ㅇ 40여 개의 골짜기가 굽이치는 남산은 예부터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는 대상이었고, 그 역사가 지금도 곳곳에 서려 있다. ‘동남산 가는 길’에서 남산의 동쪽을 따라 걸었다면, ‘삼릉 가는 길’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모두 담은 남산의 서쪽 부분을 둘러보는 코스다. 알에서 태어난 비범함으로 서라벌을 건국한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 그와 그의 왕비가 잠든 능이 있는 오릉 그리고 신라가 가장 번성했던 헌강왕 시기의 연회 장소인 포석정지. 신라의 시작부터 가장 흥했던 시기를 지나 저물어가는 순간까지, 모든 역사를 지켜본 땅 위를 담담히 거닐어 본다(경주문화관광 사이트 인용)
ㅇ 신라탐방길 조성사업으로 추진한 '삼릉 가는 길'은 사업비 9억(국비6억3000, 지방비2억7000)을 들여 2011년 8월에 준공되었다. 월정교∼오릉∼천관사지~포석정~삼릉 으로 이어지는 7.4㎞의 역사관광 탐방길이다. 청정 자연경관과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의 자연·역사문화 자원과 특징 있는 스토리를 엮어 편안하고 안락한 도보 중심의 길로 조성하였다.
ㅇ 조성한지 10년이 가까와지는 지금에 걸어보는 길은 담장 벽화의 도색은 퇴색되고 바닥에 깔린 이정표는 알아보기 힘들고 몇군데는 이정표가 없어서 아쉬운점이 있었다.
■ 탐방일 : 2020. 10. 22(목), 흐림, 미세먼지 약간
■ 탐방코스 : 삼릉 가는길(서남산 가는길)
월정교 - 천관사지(삼층석탑) - 오릉 - 김호장군 고택 - 일성왕릉 - 월암재 - 나정 - 양산재(육부전) - 당간지주 - 청림사지(삼층석탑) - 포석정 - 지마왕릉 - 태진지 - 배동삼존입불상 - 망월사 - 삼릉 - 경애왕릉
■ 탐방거리 : 17.41km(월정교에서 경애왕릉 왕복) * 트랭글 기록
■ 탐방시간 : 5시간 39분
지도에는 4번 양산재를 지나서 일성왕릉이나 나정으로 갈 수 있는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양산재(육부전)는 지도상 월암재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정과 같이 돌아 볼 수 있다.
출처 : 경주문화관광/경주여행/테마여행/경주10Pick/신라인의 숨결 경주 둘레길
http://www.gyeongju.go.kr/tour/page.do?mnu_uid=2942
교촌마을 앞으로 유려하게 흐르는 남천 위를 가로질러 역사와 전통이 깊은 월정교가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운 교량인데, 조선 시대에 유실된 이후 2018년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했다. 밤에는 교량을 비추는 조명이 켜져 한층 고귀한 자태의 월정교를 만날 수 있다.
월정교는 지난 10월 12일 경주 동남산 가는길에서 돌아봤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지나간다.
경주 동남산 가는 길 (1) 2020. 10. 20.
http://blog.daum.net/smirinae/6041965
경주 동남산 가는 길 (2) 2020. 10. 20
.http://blog.daum.net/smirinae/6041966
천관사지
사적 제340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
이 절터는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의 집을 절터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잘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며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국립경주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안내판의 내용에는 없지만 김유신의 그 일이 있고 천관은 유신을 사모하다 못해 끝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남자는 출세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버림받은 여인은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공한 남자는 훗날 죽은 여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여인의 이름을 따 절을 지었다. 이 신파 같은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남자 주인공이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金庾信·595~673)이기 때문이다. 출처 : 경북일보
경주 오릉
사적 제172호
이곳은 신라 박씨 왕들의 시조인 박혁거세왕과 그의 왕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시조왕은 기원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짓었다. 남해왕은 서기 8년 탈해가 뛰어난 인물이란 말을 듣고 불러 사위로 삼고 10년 대보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 9년(32)에 6촌을 6부로 고치고 이들에게 이.최.손.정.배.설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을 마련했다고 한다.
파사왕은 가야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이웃한 소국들은 병합해 신라의 영토를 확장했다.
다섯 무덤 가운데 서쪽 무덤이 가장 큰데 직경 약 33m, 높이 약7m이다. 이 무덤의 동쪽에는 최근에 만든 상석, 표석과 진입부가 있고, 진입부에는 일자 제각이 있다. 남쪽 무덤은 봉문 두개가 이어져 있다. 무덤의 외형으로 보아 가까운 대릉원 일대의 고분처럼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능원 안에는 박혁거세왕을 제향하는 숭덕전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동쪽에는 알영부인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알영정이 있다.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이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지었으나 임진왜란때 불탔다. 선조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 30년(1704)에 고쳐 지었다. 경종 3년(1723) 숭덕전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영조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 안쪽으로 영숭문과 숙경문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인 맞배지붕건물이다. 왼쪽에 상현재, 오른쪽에 동재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뒤쪽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알영정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다. 옛 문헌에는 알영정이 경주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으며, 우물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알영은 자라면서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추었는데, 시조왕께서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아 들였다. 알영 왕비는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두 성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주월암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제34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33
이 가옥은 400여 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개인의 집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웠던 부산첨사 김호 장군의 생가로 전해지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기와집 안채가 있고, 서쪽에 초가집 행랑채를 두었으며 동북쪽에 사당을 두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건물을 구성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안채는 앞으로 퇴칸이 없는 4칸집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있는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이다.
아랫채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왼쪽부터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하여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사당은 낮은 토담에 문을 달았다.
이 곳은 원래 신라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며, 많은 돌 자재 들이 있다. 특히 집안의 우물돌은 원래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간사지 석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902
이 우물은 남간사터로 짐작되는 남간 마을의 도연 언덕비탈에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남간사는 헌덕왕 12년(820) 이전에 세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우물의 형태는 위쪽 1번이 약 1.2m인 방형이고 현재 깊이는 약 1.4m이다. 자연석재로 우물의 외벽을 짜 올리고, 위쪽은 남북으로 합쳐지는 2매의 다듬은 돌로 원형 틀을 덮어 마감하였다.
우물의 지름은 88cm이다. 우물틀 둘레에 상.하 이중테를 둘렀는데, 윗단은 직각이고 아랫단은 곡선으로 조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이 우물은 분황사 석정, 재매정과 더불어 신라 우물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경덕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이 사당은 신라 개국의 원훈이며 우리나라 배문의 시조이신 금산가리촌장 배지타와 그 후손으로 고려 개국의 원훈이며 배문의 중시조이신 무열공 배현경을 모신 사당이다. 이 밖에 조선 개국의 원훈이신 정절공 배극렴도 무절공의 후손으로 배문에서는 삼조원훈을 배출하였다.
경주 일성왕릉
사적 제173호
이곳은 신라 제7대 일성왕(134~154재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성왕은 박씨이고 이름은 일성, 왕호는 이사금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일성왕은 재위 기간에 정사당을 설치하여 대신들과 함께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경작지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다.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 산기슭에 있다. 이곳은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 나정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무덤은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 일부가 드러나 있다. 능 앞에는 1871년에 세운 표석이 있다.
월암재
경북 경주시 남간안길 5-10, (지번) 탑동 749-2
월암재는 1534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조 때 무과에 급제 후 20년의 관직 생활 끝에 훈련원 봉사를 사직, 하향아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김호 장군의 재실입니다. 당시 장군은 의병을 모아 수시로 적진을 공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려 부산 첨사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경주 노곡에서 북상하는 왜군 500여기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1758년(영조34년) 다시 형조참판에 추중되었습니다.
월암재는 경주의 걷기 좋은 길로 선정된 '월정교에서 삼릉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근에는 박혁거세 탄강지 나정, 6부 촌장을 모신 양산재, 신라 최초 왕궁터인 창림사지 3층석탑, 남간사지 당간지주, 일성왕릉, 포석정, 노천박물관 남산 등 신라의 정기를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있씁니다. 최근 '문화재 활용이 보존이다' 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2009년부터 신라분화원에서 개보수 후 고택문화체험 장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안내판의 박혁거세 탄강설화를 살펴보면~
나정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해오는 곳이며, 1803년(순조3년)에 시조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박혁거세 탄강설화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9년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상서로운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굻고 경배하듯이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빛이 나는 붉은 색의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고 그 알에서 자태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다. 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성을 '박' 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 그가 13세 되던 기원전 57년 6촌의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고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나정 발굴조사 과정을 보면 ~
발굴조사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진행되어 1~4차 시설이 조사되었다. 그 결과 팔각건물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기타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1,390여 점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1,3차 유구는 잘 남아있으나 2,4차 시설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경주 나정
사적 제245호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로, 오릉의 동남쪽에 있는 남산 식혜곡과 장창곡 사이의 완만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날에 진한 땅에는 여섯 촌이 있었는데, 기원전 69년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보았더니, 말은 간 곳이 없고 단지 큰 알만 있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타와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박혁거세라 하였다. 박혁거세는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며 기량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박혁거세가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이르러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받들었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조선 순조 3년(1803)에 신라 시조 임금의 내력을 새긴 유허비를 이곳에 세웠으며, 이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하여 신라시대의 팔각 건물지를 비롯한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탄생 설화와 관련된 신궁 또는 국가적인 제의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육부전
양산 아래에 있는 육부전은 진한 육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하기 전에 진한 땅에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기원전 57년에 여섯 촌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서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이다.
그 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여섯 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육촌을 육부로 고치고 각기 성을 내렸다. 양산촌은 양부 이씨, 고허촌은 사랑부 최씨, 대수촌은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씨, 진지촌은 본피부 정씨, 가리촌은 한기부 배씨, 고아촌은 습비부 설씨이다.
이 여섯 성씨가 신라의 초대 성씨이며,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에 육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곳을 양산재라고 부르다가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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