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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트래킹# 탐방 #답사

삼릉 가는 길 (서남산 가는 길) 1

by 영영(Young Young) 2020. 11. 1.

ㅇ 40여 개의 골짜기가 굽이치는 남산은 예부터 신라인들이 신성시하는 대상이었고, 그 역사가 지금도 곳곳에 서려 있다. ‘동남산 가는 길’에서 남산의 동쪽을 따라 걸었다면, ‘삼릉 가는 길’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모두 담은 남산의 서쪽 부분을 둘러보는 코스다. 알에서 태어난 비범함으로 서라벌을 건국한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 그와 그의 왕비가 잠든 능이 있는 오릉 그리고 신라가 가장 번성했던 헌강왕 시기의 연회 장소인 포석정지. 신라의 시작부터 가장 흥했던 시기를 지나 저물어가는 순간까지, 모든 역사를 지켜본 땅 위를 담담히 거닐어 본다(경주문화관광 사이트 인용)

ㅇ 신라탐방길 조성사업으로 추진한 '삼릉 가는 길'은 사업비 9억(국비6억3000, 지방비2억7000)을 들여 2011년 8월에 준공되었다. 월정교∼오릉∼천관사지~포석정~삼릉 으로 이어지는 7.4㎞의 역사관광 탐방길이다. 청정 자연경관과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지붕없는 박물관 남산의 자연·역사문화 자원과 특징 있는 스토리를 엮어 편안하고 안락한 도보 중심의 길로 조성하였다. 

ㅇ 조성한지 10년이 가까와지는 지금에 걸어보는 길은 담장 벽화의 도색은 퇴색되고 바닥에 깔린 이정표는 알아보기 힘들고 몇군데는 이정표가 없어서 아쉬운점이 있었다. 

■ 탐방일 : 2020. 10. 22(목), 흐림, 미세먼지 약간
■ 탐방코스 : 삼릉 가는길(서남산 가는길)
월정교 - 천관사지(삼층석탑) - 오릉 - 김호장군 고택 - 일성왕릉 - 월암재 - 나정 - 양산재(육부전) - 당간지주 - 청림사지(삼층석탑) - 포석정 - 지마왕릉 - 태진지 - 배동삼존입불상 - 망월사 - 삼릉 - 경애왕릉  
■ 탐방거리 : 17.41km(월정교에서 경애왕릉 왕복)  * 트랭글 기록 
■ 탐방시간 : 5시간 39분

 

 

▲ 구글어스에 표기한 트랙모습이다. 1~20번 번호순으로 월정교에서 오릉까지 왕복탐방하였다.
▲ 국제신문의 삼릉 가는 길 트랙이다. 월정교에서 경애왕릉까지 가는 코스는 오늘 본인이 돌아본 것과 같다.
▲ 경주시 문화관광홈페이지의 삼릉 가는 길 탐방지도이다.

지도에는 4번 양산재를 지나서 일성왕릉이나 나정으로 갈 수 있는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양산재(육부전)는 지도상 월암재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정과 같이 돌아 볼 수 있다. 

 

 

▲ 삼릉가는 길의 '태진지' 못가에 설치된 안내판을 촬영한것이다.
▲ 신라의 시작과 끝을 따라 가는 길, 삼릉 가는 길 탐방로상 주요 명소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출처 : 경주문화관광/경주여행/테마여행/경주10Pick/신라인의 숨결 경주 둘레길

http://www.gyeongju.go.kr/tour/page.do?mnu_uid=2942

 

http://www.gyeongju.go.kr/tour/page.do?mnu_uid=2942�

 

www.gyeongju.go.kr

 

 

▲ 집에서 56km 떨어진 월정교 공용주차장(경북 경주시 교동 153-5)을 네비에 맞추고 아침 8시 10분경 주차장에 도착한다. 평일이고 이른시간이고 날씨마저 비가 올듯해서 넓은 주차장은 정막감이 들 정도로 한적하다.
▲ 공용주차장에서 삼릉 가는 길은 파란 간판이 서있는 입구로 나와서 우향해서 진행한다. 그런데 오늘은 월정교 앞 안내판 앞에서 출발하기 위해서 역방향(좌향)으로 월정교 앞으로 이동한다.
▲ 오늘 삼릉가는 길의 출발점인 월정교 앞에서 도로건너 안내판과 이정목 앞이다. 여기서 트랭글을 켜고 탐방을 시작한다.
▲ 안내판에는 오늘 탐방길을 '서남산(삼릉) 가는길'로 표시하고 있다. 도 월정교 앞에서 우향하여 월정교 공용주차장 방향으로 이동한다.

교촌마을 앞으로 유려하게 흐르는 남천 위를 가로질러 역사와 전통이 깊은 월정교가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운 교량인데, 조선 시대에 유실된 이후 2018년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했다. 밤에는 교량을 비추는 조명이 켜져 한층 고귀한 자태의 월정교를 만날 수 있다.
월정교는 지난 10월 12일 경주 동남산 가는길에서 돌아봤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지나간다.

 

경주 동남산 가는 길 (1)  2020. 10. 20.

http://blog.daum.net/smirinae/6041965

 

경주 동남산 가는 길 (1)

ㅇ 금년 7월 31일 우연찮게 대구와 가까운 경주로 눈을 돌리게 되어 지금까지 경주 탐방에 푹 빠지게 되었다. 탐방에 나서면 개인적으로 이정목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는데, 

blog.daum.net

 

경주 동남산 가는 길 (2)  2020. 10. 20

.http://blog.daum.net/smirinae/6041966

 

경주 동남산 가는 길 (2)

경주 헌강왕릉 사적 187호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문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문치를 지향

blog.daum.net

 

 

▲ 일정로를 따라 월정교 주차장 방향으로 150미터쯤 이동하여 주차장 입간판이 서있는 삼거리에서 주차장 입구방향으로 좌향한다. 좌향하면 길 모퉁이 삼호농원 간판 아래에 삼릉가는길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생각보다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칠 수 있겠다.
▲ 주차장 입구 맞은편의 가게 앞을 지나면 삼릉가는 길 벽화가 그려진 건물을 만나고 ~
▲ 주차장 삼거리에서 좌향 200미터 이동하면 역시 벽화가 그려진 건물 삼거리를 만나 우향한다. 하단 사진은 우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 들길을 따라 100미터쯤 이동하면 볼록거울이 서있는 삼거리를 만나 좌향한다. 하단 우측 사진은 좌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 마을 외곽 들판 포장길을 따라 이동하면 길 좌측 월정루 한옥 옆에 지진관측장비가 보이고 ~
▲ 이전 볼록거울 삼거리에서 120미터쯤 진행하면 좁은 농로 사거리를 만나 우향한다. 이정목이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다. 하단 사진은 우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 사거리에서 우향하여 30미터쯤 가면 오른쪽 들판으로 시멘트 포장길이 갈라지고 오른쪽길을 따라간다. 시멘트길 입구에는 바닥표식이 있다. 지금까지 온 방향은 월정교, 진행방향은 삼릉가는길, 이러한 바닥표식은 전체 코스에서 이곳 외에 창림사지 부근에서 본것 같다.
▲ 들판 가운데로 뚫린 시멘트길을 따라 150여미터 가면 들판 한가운데 안내판과 삼층석탑이 보인다. 김유신의 애달픈 사랑이 서린 천관사지와 삼층석탑이다.
▲ 삼층석탑 몇걸음 앞에 경주 천관사지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판에는 설명과 같이 그림이 있어 좀더 사질적으로 느껴진다.

천관사지 
사적 제340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
이 절터는 도당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의 집을 절터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잘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며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국립경주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안내판의 내용에는 없지만 김유신의 그 일이 있고 천관은 유신을 사모하다 못해 끝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남자는 출세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버림받은 여인은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공한 남자는 훗날 죽은 여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여인의 이름을 따 절을 지었다. 이 신파 같은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남자 주인공이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金庾信·595~673)이기 때문이다. 출처 : 경북일보

 

 

▲ 애틋한 천관의 사랑이 서린 천관사지 절터에 서있는 탑의 의미는 무얼까?
▲ 천관사지에 팔각삼층석탑이 있었다는 사실을 2016년에 확인하고 현지에 남아있던 폐탑의 기단석과 탑부재 등을 이용하여 새롭게 복원된 석탑이다. 탑 주위에 탑에 대한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석탑은 방형의 이중기단에 팔각탑신석과 옥개석을 갖춘 신라시대 이형석탑이다.
▲ 팔각삼층석탑에서 천관사지 안내판 방향으로 본 모습이다.
▲ 삼층석탑 앞에서 이어지는 길이 흐지부지하여 들어온 입구로 되돌아 나가서 우향하여 황토 포장도를 따라간다. 탐방로의 우측에는 천관사지 들판에 서있는 삼층석탑과 그 뒤로 경주 교동 마을이 들어서 있다.
▲ 220미터쯤 가면 이정목이 서있는 들판 삼거리에서 우향한다. 우측 하단사진은 우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지금까지 온 방향은 월정교 520m, 진행방향은 우측 오릉 600m 방향이다.
▲ 들판 포장도를 따라가며 천관사지 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좌)과 진행방향의 모습(우)이다.
▲ 200미터쯤을 가면 들판 네거리를 만나서 탑리2길 방향으로 직진한다.
▲ 삼릉가는길 벽화가 그려진 탑리2길을 따라 260미터쯤 이동하면 숭덕전 앞 포석로에 접속하여 길건너 좌향한다.
▲ 길 건너기전 왼쪽 도로가에는 이정목과 '탑마을' 표석이 자리하고 있고 ~ 지금까지 온 방향은 천관사지 600m, 진행방향은 길건너 좌향하여 오릉 180m 방향이다.
▲ 길 건너 숭덕전 앞에서 좌향하여 돌아 본 모습이다.
▲ 포석로를 따라 90여미터 이동하여 오릉 표지판 뒤에서 오른쪽으로 턴하면 주차장 이용 안내판이 서있는 오릉 주차장 입구를 만난다.
▲ 주차장을 따라 오릉 입구쪽으로 이어진 가로수는 붉게 물들어가며 가을속을 달려가고 있다.
▲ 입구에서 180미터쯤 주차장을 따라 가면 오릉 안내판을 지나 우측에 오릉 입구가 있다.

경주 오릉
사적 제172호
이곳은 신라 박씨 왕들의 시조인 박혁거세왕과 그의 왕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시조왕은 기원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이라 하였고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짓었다. 남해왕은 서기 8년 탈해가 뛰어난 인물이란 말을 듣고 불러 사위로 삼고 10년 대보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 9년(32)에 6촌을 6부로 고치고 이들에게 이.최.손.정.배.설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을 마련했다고 한다. 
 파사왕은 가야와 백제에 대한 방어체제를 정비하면서 이웃한 소국들은 병합해 신라의 영토를 확장했다. 
 다섯 무덤 가운데 서쪽 무덤이 가장 큰데 직경 약 33m, 높이 약7m이다. 이 무덤의 동쪽에는 최근에 만든 상석, 표석과 진입부가 있고, 진입부에는 일자 제각이 있다. 남쪽 무덤은 봉문 두개가 이어져 있다. 무덤의 외형으로 보아 가까운 대릉원 일대의 고분처럼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능원 안에는 박혁거세왕을 제향하는 숭덕전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동쪽에는 알영부인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알영정이 있다. 

 

 

▲ 경주시민이 아니라 입장료 2000원을 주고 입구로 들어서서 길게 뻗은 황토길을 따라간다.
▲ ㅜ자 삼거리에서 '신라오릉정화사업기념비'를 만나고 비석 앞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삼릉 경내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바꾸 돌아보고자 한다.
▲ 오른쪽으로 가면 숭덕전과 부속건물 및 비각과 비석이 있는데 ~
▲ 들어가는 입구에 '숭성각' 건물이 있고, 그 앞과 오른쪽에 '숭덕전' 안내판과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그 오른쪽에 '영숭문'이 있다.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이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지었으나 임진왜란때 불탔다. 선조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 30년(1704)에 고쳐 지었다. 경종 3년(1723) 숭덕전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영조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홍살문 안쪽으로 영숭문과 숙경문을 지나면 숭덕전이 위치하고 있다. 숭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인 맞배지붕건물이다. 왼쪽에 상현재, 오른쪽에 동재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고, 뒤쪽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 숭덕전 부속건물 앞을 나와 우향하여 오릉 방향으로 이동한다. 다른 유적지에 비해 한적한 분위기라 조용히 사색하기 좋다.
▲ 오릉 방향으로 가다가 박혁거세의 알영부인이 태어났다는 우물이 있는 알영정으로 우향하여 대나무 숲 옆길을 따라간다.
▲ 자그만 비각 앞에 안내판이 서있다.

알영정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다. 옛 문헌에는 알영정이 경주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으며, 우물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알영은 자라면서 빼어난 용모와 덕행을 갖추었는데, 시조왕께서 소문을 듣고 왕비로 맞아 들였다. 알영 왕비는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왕과 왕비를 두 성인이라 불렀다고 한다. 

 

 

▲ 비각 안에는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라는 한문이 새겨져 있다.
▲ 알령정에서 나와 오릉 주위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다.
▲ 초기 박씨 왕 4 명과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부인을 한 자리에 모셨다고 하여 오릉(五陵)이라 하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사릉'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기록을 보면 박혁거세가 하늘로 승천한 후 시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하나로 모으려고 하자 큰 뱀이 방해해서 그대로 다섯군데에 매장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 호위무사들 처럼 오릉을 둘러싼 소나무들도 불거리인데 그렇게 수령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 오릉 주위를 돌아 제각 앞을 지나 왕릉으로 돌아보고 ~
▲ 이곳의 역사를 함께하는 거목들을 만나고 ~
▲ 수련으로 가득 찬 자그만 연못주위를 지나 ~
▲ 오릉 숲은 오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 오릉을 한바꾸 돌고 밖으로 나와 입구의 전경을 담고서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 단풍과 낙엽으로 이미 가을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가로수를 따라 오릉 주차장 입구로 되돌아 나간다.
▲ 주차장 입구 삼거리에서 우향한다. 우측 사진은 우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 우향해서 포석로를 따라 남산.포석정 안내판을 지나고 ~
▲ 오릉 주차장에서 170미터를 가면 오릉네거리를 만나 포석정 방향으로 직진후 경주빵 건물지나 곧바로 좌향한다.
▲ 여기서 잠깐 오릉네거리 좌측 방향에 삼릉가는 길 이정목이 서있는데 김호장군고택을 사거리에서 왼쪽 방향으로 잘못 가르키고 있다. 왼쪽 서라벌대로를 이용해도 김호장군고택을 갈 수는 있지만 그렇게 돌아 갈 이유가 전혀없기 때문에 잘못된 표시이다.
▲ 경주빵.찰보리빵 가게 앞을 지나 곧바로 삼거리 석향수석 안내판 뒤에 삼릉가는길 표석이 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고 위치도 좋지않아 쉽게 볼 수 없다.
▲ 오릉네거리에서 직진하여 곧바로 삼거리에서 좌향해서 삼릉가는 길 벽화가 그려진 건물을 지나 탑리5길을 따라간다.
▲ 퇴색 오염된 벽화는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고 ~ 추수가 끝난 들판 뒤로 폐교를 활용한 '경주인성교육체험장'이 보이고 ~ 경주빵,찰보리빵 가게에서 260미터쯤 이동하면 체험장 울타리 앞에서 삼거리를 만나서 우향(직진)한다.
▲ 우향해서 몇걸음 옮기면 체험장 정문 앞을 지나 ~ 지나 온 체험장 방향으로 되돌아 본다.
▲ 탑동 마을을 향해서 이어지는 들판 포장길을 따라서 ~
▲ 체험장에서 320미터쯤 이동하면 이정목이 서있는 마을 앞 작은 4거리를 만나서 직진한다. 하단우측 사진은 직진해서 4거리로 돌아 본 모습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당간지주 650m, 진행방향은 직진하여 김호장군고택 150m 방향이다.
▲ 사거리에서 직진해서 마을방향으로 ~
▲ 100여미트 이동하면 안내판과 이정목이 서있는 '식혜골 마을회관(경로당)'을 만난다.
▲ 경로당 오른쪽 이정목이 서있는 삼거리에서 왼쪽은 도당터널 320m, 오른쪽 김호장군고택 120m 방향으로 들어서면 누비국가무형문화재 김해자의 표식앞을 지나 '김호장군고택(경주월암종택)'을 만난다.
▲ 종택의 입구 우측에 안내판과 표석이 서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와 왼쪽에 초가 행랑채가 보인다.

경주월암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제34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33
이 가옥은 400여 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개인의 집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웠던 부산첨사 김호 장군의 생가로 전해지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기와집 안채가 있고, 서쪽에 초가집 행랑채를 두었으며 동북쪽에 사당을 두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 규모에 왼쪽부터 부엌, 방, 대청, 방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건물을 구성한 기법들은 옛 법식을 따르고 있고 대청 앞에는 문짝을 달았다. 
 안채는 앞으로 퇴칸이 없는 4칸집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있는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이다. 
 아랫채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지붕은 초가지붕이다. 왼쪽부터 방, 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굴뚝을 부뚜막 한쪽에 설치하여 구성의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사당은 낮은 토담에 문을 달았다. 
 이 곳은 원래 신라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며, 많은 돌 자재 들이 있다. 특히 집안의 우물돌은 원래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고택을 나오면 주차장 앞에 이정목이 서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삼릉 5.5km 방향을 따라간다. 하단 최우측 사진은 우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 굽이치는 전원의 들판길을 따라 ~ 무섭게 짖어대는 검둥이 농장 앞을 지나 ~ 월암종택 앞에서 들판길 따라 370미터쯤 이동하면 벽화가 그려진 남간안길 마을 삼거리에 닿는다.
▲ 삼거리에서 지나 온 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좌)과 삼거리에서 좌향해서 돌아 본 모습(우)이다. 여기에서 90미터쯤 떨어진 남간사지 석정을 돌아보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왼쪽 남간마을회관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 앞 삼거리에서 좌향하면 후방에 곧바로 삼릉가는길 벽화가 그려진 삼거리가 있고 우향하면 우측 아래 공터에 작은 바위들이 보이는 남간사지가 석정이 있다.
▲ 공터의 왼편에는 평평한 석재 4개가 사각으로 놓여있고, 공터의 오른편에는 석정이 위치한다.
▲ 석정과 안내판, 그리고 반대편에 위치한 평평한 돌의 모습이다.

남간사지 석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902
 이 우물은 남간사터로 짐작되는 남간 마을의 도연 언덕비탈에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남간사는 헌덕왕 12년(820) 이전에 세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우물의 형태는 위쪽 1번이 약 1.2m인 방형이고 현재 깊이는 약 1.4m이다. 자연석재로 우물의 외벽을 짜 올리고, 위쪽은 남북으로 합쳐지는 2매의 다듬은 돌로 원형 틀을 덮어 마감하였다. 
 우물의 지름은 88cm이다. 우물틀 둘레에 상.하 이중테를 둘렀는데, 윗단은 직각이고 아랫단은 곡선으로 조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이 우물은 분황사 석정, 재매정과 더불어 신라 우물의 원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공터 옆에 가정집 같은 대문에 남간교회 간판이 보이고 아까 지나 온 삼거리로 되돌아나가 왼쪽 방향을 따라간다.
▲ 퇴색한 벽화 시멘트길을 따라 ~
▲ 110미터쯤 가면 벽화와 삼릉가는길 표석이 자리한 삼거리를 만나 왼쪽길로 이어간다. 하단 최우측 사진은 좌향해서 돌아 본 모습이다.
▲ 70여미터 가면 남간마을회관(경로당) 앞 삼거리를 만나서 우향한다.
▲ 마을회관 앞에서 50미터쯤 가면 이정목이 서있는 들판 네거리를 만나는데 ~ 하단 우측사진은 지나 온 회관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이다. 오른쪽은 창림사지, 직진은 당간지주, 진행방향은 왼쪽 일성왕릉으로 갔다가 이곳으로 되돌아와 오른쪽 창림사지 방향으로 월암재와 나정, 양산재(육부전)을 차례로 돌아보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직진 방향으로 당간지주와 청림사지(삼층석탑)을 돌아 보기로 한다.
▲ 네거리에서 좌향하여 일성왕릉을 찾아간다. 아까전에 보았던 '남간사지 석정'은 일성왕릉 방향으로 120여미터 가다가 왼쪽길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전주에 붙은 노란색 보광사 안내판을 따라 간다.
▲ '육화문' 편액이 걸린 규모가 꽤 크게 보이는 '경덕사'를 만나고 ~ 사찰(절)인줄 알고 안내판을 읽어보니 사당이다.

경덕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이 사당은 신라 개국의 원훈이며 우리나라 배문의 시조이신 금산가리촌장 배지타와 그 후손으로 고려 개국의 원훈이며 배문의 중시조이신 무열공 배현경을 모신 사당이다. 이 밖에 조선 개국의 원훈이신 정절공 배극렴도 무절공의 후손으로 배문에서는 삼조원훈을 배출하였다. 

 

 

▲ 회관 부근 네거리에서 240미터쯤 이동하면 이정목이 서있는 삼거리를 만나서 안내판 따라 일성왕릉 방향으로 우향한다.
▲ 우향하면 곧바로 보광사 주차장이 보이고 주차장 안쪽으로 보광사 입구를 지나 담장끝에서 왼쪽으로 탐방로가 이어진다. 보광사는 전통사찰이 아니라 웹상에 그 기록이 거의 없다.
▲ 보광사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바로 코앞에 금강저수지가 내려 보인다.
▲ 보광사 주차장을 내려와 전방에 보이는 송림숲으로 220미터쯤 길을 따르면 ~ 호젓하게 자리잡은 일성왕릉이 눈에 들어온다.
▲ 왕릉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안내판이 서있다.

경주 일성왕릉
사적 제173호
이곳은 신라 제7대 일성왕(134~154재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성왕은 박씨이고 이름은 일성, 왕호는 이사금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일성왕은 재위 기간에 정사당을 설치하여 대신들과 함께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경작지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다. 
 이 능은 남산의 서북쪽 산기슭에 있다. 이곳은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전해지는 나정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무덤은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 일부가 드러나 있다. 능 앞에는 1871년에 세운 표석이 있다. 

 

 

▲ 왕릉의 봉분은 지름 약 16m, 높이 약 5m이며 봉분 내부에는 돌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앞 2단 축대는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왕릉 둘레를 좌에서 우로 한바꾸 돌고 왔던 곳으로 나간다.
▲ 보광사와 경덕사를 지나 남간마을 앞 4거리로 되돌아와 정자방향으로 직진해서 월암재와 나정, 양산재(육부전)을 차례로 돌아보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왼쪽방향으로 당간지주와 청림사지(삼층석탑)을 돌아 보기로 한다.
▲ 정자앞으로 가는 길 우측에는 옛 사대부가를 상징하듯 으리으리(?)한 한옥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 110미터쯤 가면 길 오른쪽에 월암재 안내판과 함께 샛길이 열려있다.
▲ 큰길에서 벗어나 안내판을 따라 우향해서 오르막을 따라 왼쪽 비각앞을 지나 60미터쯤 올라가면 안내판이 서있는 '월암재'를 만난다.
▲ 건물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멀리서 전경만 보고 뒤로 물러 나왔다. 월암재는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김호 장군의 재실로 현재 고택문화체험 장소로 활용중이다.

월암재
경북 경주시 남간안길 5-10, (지번) 탑동 749-2
월암재는 1534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조 때 무과에 급제 후 20년의 관직 생활 끝에 훈련원 봉사를 사직, 하향아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김호 장군의 재실입니다. 당시 장군은 의병을 모아 수시로 적진을 공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려 부산 첨사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경주 노곡에서 북상하는 왜군 500여기를 섬멸하는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전사하였습니다. 1758년(영조34년) 다시 형조참판에 추중되었습니다. 
 월암재는 경주의 걷기 좋은 길로 선정된 '월정교에서 삼릉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인근에는 박혁거세 탄강지 나정, 6부 촌장을 모신 양산재, 신라 최초 왕궁터인 창림사지 3층석탑, 남간사지 당간지주, 일성왕릉, 포석정, 노천박물관 남산 등 신라의 정기를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있씁니다. 최근 '문화재 활용이 보존이다' 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2009년부터 신라분화원에서 개보수 후 고택문화체험 장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 월암재 입구에서 150미터쯤 남간길을 따르면 이정목이 서있는 양산재 입구 사거리를 만난다. 되돌아 오는길에 오른쪽에 있는 양산재를 보기로 하고 나정 방향으로 직진한다.
▲ 사거리에서 경주 나정 안내판과 차량 통제봉이 설치된 길로 직진한다.
▲ 야자매트가 깔린 호젓한 길을 따라 160미터쯤 가면 경주 나정을 만난다.
▲ 나정 둘레로 울타리가 쳐있지만 입구가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큼직한 경주 나정 안내판이 보인다.
▲ 사적 제245호로 지정된 경주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이다.

안내판의 박혁거세 탄강설화를 살펴보면~
나정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해오는 곳이며, 1803년(순조3년)에 시조왕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박혁거세 탄강설화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9년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상서로운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굻고 경배하듯이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빛이 나는 붉은 색의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고 그 알에서 자태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박혁거세다. 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성을 '박' 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고 하였다. 그가 13세 되던 기원전 57년 6촌의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고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나정 발굴조사 과정을 보면 ~
발굴조사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진행되어 1~4차 시설이 조사되었다. 그 결과 팔각건물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기타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1,390여 점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1,3차 유구는 잘 남아있으나 2,4차 시설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 나정을 반 시계 방향으로 한바꾸 빙 돌아본다. 이곳에서 출토된 석재들을 가장자리 한군데 모아 놓은 것으로 보이고, '경주나정' 표석은 무슨 연유인지 바닥에 누워있다.
▲ 4차례의 발굴후에 세운 표석, 발굴기간과 단체, 조사내역 등이 간략히 적혀있다.
▲ 경주 나정은 나즈막한 동산을 평평하게 깎아서 조성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나정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도 유구한 세월을 함께하고 있다.
▲ 입구에서 좌측 방향에 또 하나의 나정 안내판이 서있다.

경주 나정
사적 제245호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깃든 우물로, 오릉의 동남쪽에 있는 남산 식혜곡과 장창곡 사이의 완만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날에 진한 땅에는 여섯 촌이 있었는데, 기원전 69년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이를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보았더니, 말은 간 곳이 없고 단지 큰 알만 있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타와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박혁거세라 하였다. 박혁거세는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며  기량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박혁거세가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이르러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받들었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조선 순조 3년(1803)에 신라 시조 임금의 내력을 새긴 유허비를 이곳에 세웠으며, 이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하여 신라시대의 팔각 건물지를 비롯한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탄생 설화와 관련된 신궁 또는 국가적인 제의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 나정 입구로 나와 반대편으로 몇걸음 옮기니 백마와 흑마 조형물이 서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 나정 입구를 지나 왔던길로 되돌아 나가면서 ~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음 경유지인 양산재(육부전)가 보인다.
▲ 양산재 입구 4거리로 되돌아와 ~ 좌향하여 양산재로 이동한다. 입구의 안내판이 완전히 탈색되어 흰색으로 변해있다.
▲ 좌향하여 ~ 등산객 장기주차 금지 안내판을 지나서 ~
▲ 80미터쯤 이동하면 안내판이 서있는 육부전을 만난다. 외삼문에는 '대덕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육부전
양산 아래에 있는 육부전은 진한 육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하기 전에 진한 땅에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기원전 57년에 여섯 촌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서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이다. 
 그 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여섯 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육촌을 육부로 고치고 각기 성을 내렸다. 양산촌은 양부 이씨, 고허촌은 사랑부 최씨, 대수촌은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씨, 진지촌은 본피부 정씨, 가리촌은 한기부 배씨, 고아촌은 습비부 설씨이다. 
 이 여섯 성씨가 신라의 초대 성씨이며,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에 육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곳을 양산재라고 부르다가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육부전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우에서 좌로 외곽을 한바꾸 돌아본다.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양산재는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으로 새롭게 이름을 바꾸었다.
▲ 들과 숲으로 둘러싸인 육부전 뒷쪽으로 한바꾸 돌아 육부전 좌전면으로 와서 ~
▲ 양산재 표석과 월암재 가는 길 안내판이 서있는 사거리로 되돌아와 좌향하여 월암재 방향으로 이동한다.
▲ 월암재 입구를 지나 정자에서 간식을 하면서 잠시 쉬었다가 ~
▲ 직후방 이정목이 서있는 남간 마을입구 네거리에서 ~
▲ 우향하여 당간지주 방향으로 이동한다. 우측 사진은 우향하여 네거리 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