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헌강왕릉 사적 187호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경문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문치를 지향하였다. 재위 기간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헌강왕이 죽은 후에 보리사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이 있는 곳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 자락이다. 무덤 아래쪽에 4단의 둘레돌이 둘러져 있다. 1993년에 발굴조사로 석실 내부구조를 확인하였다. 동남쪽으로 널길이 있고 서쪽으로 석실을 배치하였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등이 있으며, 서쪽 벽 접하여 시신을 안치한 시상이 있다.
경주 정강왕릉 사적 제186호 이 능은 신라 제50대 정강왕(886~887재위)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강왕은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현강왕의 동생이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여 왕이 친히 강연을 들었다. 정강왕은 병이 깊어지자 누이동생인 만(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재위기간은 만 1년에 불과하다. 현강왕과 마찬가지로 보리사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 능선 끝자락에 있는데 북쪽에는헌강왕릉이 있다. 무덤 아래쪽에는 다듬은 돌을 3단으로 쌓아 만든 둘레돌이 둘러져 있다.
통일전(統一殿) 이곳 남산은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닦던 신라의 성산이다. 골골이 남아있는 석불, 석탑, 사지 등은 천년 서라벌의 찬연한 문화를 꿈처럼 간직하고 있다. 신라는 서기 660년 백제를 병합하고 삼국문화를 융합하여 통일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를 받들어 이 곳에 통일전을 조성한 것은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 받아 발전하는 조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함이다. 통일전에는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화랑에는 삼국통일의 기록화가 전시되었다. 경역에는 삼국통일 기념비와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의 사적비가 서있다. 우리는 신라 삼국통일의 정신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기어이 완수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하겠다.
통일전에서 염불사지 방향은 아래 링크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문화유산탐방로 2구간(염불사지 - 칠불암 - 새갓골) 2020. 9. 11.
한 노인이 이곳에서 왕에게 편지를 바친곳이라 하여 서출지라 불리우고, 편지에는 역모를 꾀하던 궁주와 승려가 몰래 숨어있던 거문고 갑을 화살로 쏘라고 하여 소지왕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요당은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임적이 지은 건물이다. 연못에 돌을 쌓아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당초에 3칸 규모였으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팔각지붕 ㄱ자 모양의 구조를 갖추었다. 이요당은 요산요수의 뜻을 취해 편액하였으며, 남쪽 양피못 언덕에는 임적의 아우 임극이 지은 산수당이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무량사는 대대로 풍천임씨 집안의 고택이었던 한옥을 절로 바꾸어 1972년부터 조계종의 사찰로 된 곳이며,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 대웅전 건물은 400년도 더 된 오래된 건물이다.
사적 제 138호, 못둘레 약 200m인 서출지는 신라때부터 내려오는 저수지로서 신라 소지왕이 488년 남산 기슭에 있었던 천천정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의 자취를 따라가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 주었고, 왕이 그 봉투 속의 글을 보고 궁중의 간계를 막아 목숨을 건졌다 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연못가에는 현종 5년(1664년)에 임적이 지은 '이요당'이라는 소박한 정자가 있다.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안내판 이 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탑은 3층인데,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 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을 얹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 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서탑은 이중 기단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적인 형태로 윗기단의 몸체에 팔부신종을 돋을 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이곳은 염불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남산 동쪽 봉구곡 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피리사라는 절에 신이한 승려가 있어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염불 소리는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스님을 공경였으며, 스님이 돌아가신 후 피리사를 염불사로 고쳐 불렀다.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2기 모두 무너져 있었으며,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탑의 석재는 1963년 불국사 역 앞으로 옮겨져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계석과 합하여 새로운 탑을 세우는데 이용 되었으며, 이후 염불사지 삼층석탑 복원 공사를 위하여 2008년 1월에 해체하였다. 염불사지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3년과 2008년 두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2009년 1월에 동.서 삼층석탑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월정교(경주시 교동)에서 출발하여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경주시 남산동)까지 이어지는 '동남산 가는 길' 탐방을 여기서 마치고, 가까운 식당에서 간단히 중식울 하고 출발점인 월정교까지 다시 걸어가기로 한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길과 거의 같지만 부분적으로 몇군데 다른곳이 있다.
되돌아 가는 코스는 왔던길과 거의 비슷하지만 부분적으로 조금씩 다른곳이 몇군데 있다. 코스에 대한 설명은 올때 보았던 곳은 거의 생략하고 다른 부분만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출토지 이곳 석실에서 석조미륵여래좌상이 출토되어 1925년 4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고, 1959년 출토된 곳에 묘지가 들어섰다. 2011년부터 추진된 경주국립공원 경관복원(묘지이장) 사업으로 2020년 6월 묘지가 이장되어 역사적인 공간으로 회복되었다. 이 불상은 644년 생의스님이 찾아내고, 765년 3월 3일 충담스님이 차 공양을 올린 후 경덕왕에게 '안민가'를 지어 올린 삼화령 미륵세존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초 신라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불상이며, 2020년 8월 27일 보물 270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곳은 1925년 4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석조삼존불상이 출토된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때 석생의가 찾아내고, 경덕왕때 충담사가 중삼중구의 날에 차를 다려 올리던 삼화령으로 추정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