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금년 7월 31일 우연찮게 대구와 가까운 경주로 눈을 돌리게 되어 지금까지 경주 탐방에 푹 빠지게 되었다. 탐방에 나서면 개인적으로 이정목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는데, 첫번째 경주 탐방때 부터 눈에 띈것이 '동남산 가는 길'이 표기된 이정목이었다. '동남산'은 어느 지역을 말하고 '동남산 가는길'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걸까? 궁금했다.
ㅇ 경주남산(慶州南山)은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인데, 정상을 중심으로 크게 동남산(우)과 서남산(좌)으로 나뉜다. 동남산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아래 경주남산등반지도를 참고하면 '동남산권'과 '서남산권'의 개념을 짐작 할 수 있다.
ㅇ '동남산 가는 길' 탐방로는 총사업비 13억원으로 월정교에서 시작하여 불곡석불좌상, 경북산림환경연구원, 정강왕릉, 통일전 등을 거쳐 傳염불사지석탑까지 이어지는 총 8km 탐방길을 2014년도 5월에 조성하였다.
ㅇ 동남산 가는 길을 걸으면 신라와 통일신라를 잇는 역사 속 다양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효심이 담긴 춘양교지,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신라 장군과 왕의 영정을 모신 통일전, 왕을 해하려는 계략을 막는 데 도움을 준 쥐와 까마귀의 설화가 담긴 서출지까지, 머릿속으로 옛 이야기의 흐름을 그려볼 수 있고, 부처골 감실불상, 미륵골 마애여래좌상 등 신라 불교 문화재의 흔적도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ㅇ 사색과 걷기에 좋은 계절이 왔다. 맑은 가을 하늘아래 사방에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마음과 몸을 살찌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대화하며 나를 위한 쉼과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은 내가 스스로 찾아가는 행복의 길이다.
월정교(月精橋)는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63-1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교량(橋梁)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증을 거쳐 2018년 4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궁궐 남쪽 문천위에 월정교, 춘양교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장에 배 모양의 교각만 전해지고 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와 기와가 출토되어 교각 위쪽이 누각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정교는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동쪽 약 700m 상류에 센 물살에 견딜 수 있도록 유사한 춘양교가 위치하고 있다.
경주 인왕동 사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학자가 인용사지로 비정하여 전해져 온 곳이다. 인용사는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한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을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 사찰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가 망한 이후 당나라 황제가 50만 대군을 훈련시키고 설인귀를 장수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려고 할때 김인문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에 신라 사람들은 그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이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에서 승려나 왕이 아닌 개인을 위해 세운 최초의 사찰로서 당시의 신앙 형태를 추측할 수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02~2011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를 비롯한 금당지, 탑지, 회랑지, 연지와 우물 등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건물 배치 형식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였음이 밝혀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1~2003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교량에 사용됐던 석재 1,469점이 하천 바닥에 흩어진 상태로 출토됐다. 당시 흩어진 석재유물 일부는 경주박물관 서편의 남천 하상에 보존 중이었으나, 우수기 유실 등에 대한 우려가 있어 작년 8월부터 춘양교지 인근 사적지 2만7,000㎡를 정비해 석재유물 728점을 이전·전시하여 금년 5월말 춘양교지 석재유물 정비공사를 준공하였다. 이와 아울러 탐방로 436m를 개설해 월정교와 연계한 탐방로를 정비했다.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사적 제457호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던 춘양교의 다리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덕왕 19년에 궁궐 남쪽 문천위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월정교와 짝을 이루어 일정교로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으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효불효교, 칠성교 등으로 불려졌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춘양교의 규모는 길이 약 55m, 다리 상판의 너비는 적어도 12m, 높이는 5m 정도였을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교각은 센 물살에 견딜 수 있도록 주형으로 쌓았다. 다리의 규모는 물론이거니와 축조방법과 석재의 색깔, 재질까지도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700m 하류쪽에 축조되었던 월정교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다리터는 우리나라 고대 교량의 축조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왕경의 규모와 당시의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판에 있는 효불효교의 유래를 살펴보면 ~ 조선 시대에 발행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효불효교의 명칭 유래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효불효교는 부(府)의 동쪽 6리에 있는데, 신라 때에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그녀와 사통(私通)하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들들이 잠든 사이에 물을 건너서 가곤했다. 아들들은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다니니 자식된 도리로 마음이 편할 수 없어 드디어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다리를 '효불효교'라 불렀다'라고 한다. 즉 일곱 형제가 돌다리를 놓은 행위는 어머니에 대한 '효(孝)'이자 아버지에 대한 '불효(不孝)'였기에, '효불효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이다.
상서장(上書莊)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 상서장은 신라말기의 학자 고운 최치원(857~?)이 나랏일을 걱정하여 시무십여조의 글을 진성여왕에게 올렸던 곳이다. 지금은 그의 영정을 영정각에 모시고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최치원은 현안왕때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냈다. '계원필경'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기념시비의 후면에는 2013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최치원 선생의 '범해'시를 인용하여 양국의 상생협력과 우호적인 역사를 강조한 것을 기념하여 2017년에 이 시비를 세웠다는 건립취지가 적혀있다.
최치원은 38세에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부흥을 위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의 개혁안을 올렸지만 시행되지 못하고, 42세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고운대는 최치원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위에 상서장이 있고 아래에는 문천이 흐르며 월성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최치원 선생은 임금에게 시무10여조를 올리고 이곳에 올라 기다렸으나 끝내 나라의 부름을 받지 못하자 표연히 신라를 떠났다.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고운대'라고 이름짓고 그의 충정을 기렸다.
'밤길도 오래 걷다보면 새벽을 맞이한다' 경주 출신의 무명 한글운동가였던 '최햇빛' 선생을 위하여 2011년 5월5일, 지인들이 뜻을 모아 인왕동 최햇빛 선생의 옛집터에 선생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새벽돌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최햇빛 선생이 하는 일을 바라보면서 "인자 마 그만하소. 비단옷 입고 밤길 걷는 일 언제까지 할라는교?“라고 하자, 최 선생이 하셨다는 대답, ”밤길도 오래 걷다보면 새벽을 맞이한다“ 말을 돌비에 새겼다.
▲ 정자 오른쪽에 '해맞이마을' 표석이 2개가 있는데 왼쪽편 표석에 새겨진 538돌 한글날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1984. 10. 9이다. 두개의 표석은 1984년도 같은해에 설치된 것으로 왼쪽 표석은 최햇빛 선생이, 오른쪽은 김문계 동장이 새긴 것으로 두개다 한글사랑 정신이 듬뿍 담겨있다. 이곳 해맞이마을과 지나 온 반달마을은 최햇빛 선생의 주장에 의하여 지어진 마을이름이라고 한다.
경주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보물 제 198 호 신라시대 7세기 전반 이 불상은 남산 동쪽 기슭 한 바위에 자연암을 0.9m 파고 감실을 만든 후 조각한 여래좌상이다. 경주에서는 '할매부처'로 불린다. 머리부분은 깊은 돋을새김으로 되어있고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귀 부분까지 덮여있다. 얼굴은 약간 숙여져 있으며, 둥글둥글하게 조각하고 눈은 은행알처럼 두툼하게 나타내었다. 어깨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옷은 양어깨에 걸친 통견으로 하였다. 손은 옷 속에 넣어 표현하지 않았고 옷이 수직으로 흘러내려 사각형 대좌를 덮고 있다. 오른발만 밖으로 드러내어 부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대좌를 덮은 옷은 아랫단이 장막을 만들어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장창골 애기부처, 배동 삼존불과 함께 신라 석불로는 아주 이른 시기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불곡)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에 삼층석탑이 있어 '탑곡'이라 불리고 거대한 바위의 4면에 불상·보살상을 비롯하여 승상·비천·속인 등 23구의 인물상과 탑·사자·나무 등을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빈틈없이 조각한 조상군이다. 보물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불상군에서 아까 왔던 다리 방향으로 가지않고 옥룡암 경내를 통해서 옥룡암 주차장쪽으로 빠져 나간다. 경주 남산의 동북쪽 기슭,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탑곡(탑골 塔谷)에 자리 잡고 있는 옥룡암은 대한불교 정토종 소속의 사찰이다.
▲ 보리사의 전경이다. 보리사는 신라 헌강왕 12년 (886년)에 창건했으며, 경주시 남산에 있는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라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136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6-1 이 불상은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신라시대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있는 석불좌상이다.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대작이며,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다.
1907년 한국경영묘포장으로 시작한 경북산림환경연구원은 희귀 수목과 천년기념물 등 자연학습공간을 제공하고 오랜 세월 가꿔온 아름다운 산림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관람객들에게 산림과 자연이 함께하는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화랑교육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남산자락에서 1973년 5월 전국 최초의 학생 교육원으로 개원한 이래 교원 연수, 중·고생 수련교육, 재외교포 학생 교육, 사관생도 교육, 그리고 일반 대학생 교육과 공무원 교육 활동 등을 현재까지 39만 5천여 명의 수련생을 배출하여, 인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아존중, 이웃사랑, 충효실천의 원훈 아래 참다운 지도자 양성이라는 역사적 사명과 시대적 필연성을 다하기 위해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화랑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 양질의 수련활동기관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민족 통일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이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세계를 향해 웅비할 글로벌 '새화랑'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2019. 9. 1. 화랑교육원장 장석기 출 처 : 화랑교육원 홈페이지 (교육원소개/원장인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