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언제까지 경주지역의 걷기코스를 계속 이어갈지 내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왜냐면 언제까지 어디를 탐방한다는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는 자체가 내 자신에 대한 제약이기 때문에 .... 오늘은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소개된 '왕의 길' 을 선택하고 경주로 향한다.
ㅇ '왕의 길'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의 장롓길이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대왕암으로 향하던 길이라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고도 불린다. 울창한 나무 사이 오솔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신문왕이 따르던 충과 효, 그리고 이 길을 거닐던 선조들의 오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 인용)
ㅇ '왕의 길(신문왕 호국행차길)'은 신라 왕궁 반월성에서 안압지 명활성을 지나 황룡계곡, 추령, 모차골, 세수방, 용연폭포, 기림사, 감은사를 거쳐 문무왕의 해중무덤이 보이는 이견대까지 이어지는 긴 코스이지만 실제 탐방로는 '모차골'의 숲길이 시작되는 인자암(仁滋庵) 뒤 공터(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용연폭포 지나서 기림사 방향 200여미터 지점까지 약 4.5km구간에 걸쳐 조성되었다. 시작과 끝지점에는 '신문왕 호국행차길' 목재 조형물이 서있다.
* 인자암(仁滋庵), 경북 경주시 황용동 15-1 소재
ㅇ 승용차 이용시는 출발점을 추원버스정류장, 왕의길 주차장, 모차골(인자암 뒤 공터)등 탐방자의 시간과 운동량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데, 본인은 나름 최장의 코스를 걷고자 추원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여 기림사까지 왕복하였다. 신문왕 호국행차길은 경사도가 심하지 않은 호젓한 숲길로 남여노소, 가족, 연인들끼리 부담없이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 탐방일 : 2020. 11. 9(월), 맑음
■ 탐방코스 : 왕의 길(신문왕 호국행차길)
추원버스정류장 - 추원모차골회관 - 왕의길 주차장 - 모차골(인자암 뒤 공터) - 수렛재 - 숯가마터 - 세수방 - 불령봉표 - 용연폭포 - 감로암 - 기림사(왕복)
■ 탐방거리 : 19.8km * 트랭글 기록
■ 탐방시간 : 5시간 27분
출처 : http://www.gyeongju.go.kr/design/tour2019/file/dullegil/dullegil_map10.html
출처 : 경주문화관광/경주여행/테마여행/경주10Pick/신라인의 숨결 경주 둘레길 발걸음마다 깃드는 역사의 숨결, 기림사 왕의 길
왕의 길 안내
이 길은 신라의 시작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주던 길이다. 이 길은 사람과 문화를 이어주던 곳이지만, 왜구가 침략하던 주된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길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특히 이 길은 용성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잠입하던 길이며,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에게 신라의 보배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했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왕'과 '용' 그리고 '광명'과 '피리'이다. 이처럼 용이 왕이되고 왕이 용이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 신라 사직을 누천년에 이어가기 위해 미래의 비젼을 모색하던 길이 바로 이곳이다.
ㅇ 신문왕 호국행차길
신라 왕궁 반월성에서 동해안 이견대까지 이르는 이 길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되어 신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의 장례길이었으며 신문왕이 부왕을 추모하기 위해 대왕암으로 행차했던 길이기도 하다.
또한, 돌아가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내리시는 보물을 받기위해 행차하였고, 용이 전해준 만파식적과 옥대를 받아 환궁했던 길로 곳곳에 충과 효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ㅇ 개혁정치로 신라 전성기의 기반을 닦다 신문왕
신문왕은 삼국통일 직후 문무왕의 뒤를 이어 681년 신라 제31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국가제도를 정비하여 새로운 통치기반을 마련하고 내부의 난을 종결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문왕 이후 통일신라는 국가의 전성기와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ㅇ 아름다운 소리로 평화의 시대를 꿈꾸다 만파식적(萬波息笛)
돌아가신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두 가지의 보물, 대나무와 옥대를 내리시니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자 바람이 멈추고 거센 물결이 평온해졌도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만파식적조]
피리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률처럼 삼국통일 후 전쟁에 지친 백성을 위로하고 화합과 평화의 새 시대를 열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과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ㅇ 보물을 얻은 이견대(利見臺)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이견대는 681년 신문왕이 세웠으며 부왕을 추모하기 위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82년 신문왕은 이곳에서 산처럼 생긴 바위섬이 바다에 떠내려오는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섬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낮에는 둘이되고 밤에는하나로 합쳐졌다고 하며, 며칠 후 왕은 나라에 이익이 되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이견대 사적 159호)
ㅇ 멧돼지와 마주쳤을때는 뛰거나 소리를 지르면 멧돼지가 놀라서 먼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침착하게 등을 보이지 말고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움직이지 않는다. 흥분한 멧돼지를 만나면 나무나 바위가 있는곳으로 몸을 숨긴다.
ㅇ 숲에 오면 기분이 상쾌해 지는 이유는 신선한 공기와 피톤치드, 음이온을 만들어내고 우리 몸속에 행복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인데, 피톤치드는 스트레스 해소와 면역력을 강화하고 음이온은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자율신경을 진정시키며, 세로토닌(호르몬)은 심신안정과 생기, 활력을 불어준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모차골 0.4km, 수렛재까지는 1.0km, 용연폭포까지는 3.5km이다. 지금까지는 별 오르막 경사없이 편안한 계곡길이다.
ㅇ 햇빛이 비치는 숲 가장자리를 무성하게 덮고있는 덩국식물은 안정된 숲을 유지하여 통.식물을 보호하는 역활을 하지만 덩굴손, 뿌리, 줄기로 나무를 감아 오르면서 생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ㅇ 모든 생물은 후손을 만들어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퍼뜨리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동물과 달리 움직일수 없는 식물은 다양한 씨앗의 모양과 형태로 가능한 멀리 이동하게 된다.
ㅇ 혹독한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는 곤충은 작고 연약하지만 지구상 동물의 약 70%를 차지하고 계곡과 숲이 어우러진 이 길은 다양한 곤충이 살기에 매우 좋으며, 다른 동.식물과 도움을 주고 받으며 숲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요
ㅇ 숲속을 흐르는 계곡과 작은 웅덩이들,, 잠시만 눈여겨 살펴보면 물속과 낙엽, 돌 틈 사이로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들의 먹이활동은 낙엽과 여러가지 유기물을 분해하여 물을 깨끗하게 하는 역활을 한답니다.
ㅇ 지명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옛날의 흔적은 우리가 듣고 말하는 지명에도 남아 있으며, 조상들의 생각과 생활을 엿볼 수 있으므로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 자산입니다. 신문왕 길에 전해오는 지명 중 현재 정확한 장소를 찾을 수 없는것도 있지만 과거 조상들이 이 길을 빈번히 오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모차골 : 마차가 다닌 곳이라하여 "마차골"로 불리다가 "모차골"로 변했다고 함
- 수렛재 : 수레가 넘어다녔던 고개라는 의미로 이름 붙여짐
- 말구부리 : 급한 경사길에서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구부러졌다고 함
- 세수밭 : 신문왕이 긴 여정에 쉬며 손을 씻었던 곳이라 함
- 용연폭포 : 신문왕이 받은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이되어 승천하고 깊은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함.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모차골 1.4km, 용연폭포까지는 2.5km이다.
ㅇ 가을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면 나무는 겨울을 준비합니다. 광합성 활동이 줄어들고 잎속의 녹색 엽록소는 분해 되지요. 이때 가려있던 노란 색소가 색깔을 나타내게 되며, 줄기로 가지 못한 영양분은 잎 속에 썪여서 붉은색을 나타낸답니다.
ㅇ 조선의 개혁을 꿈꾸었던 효명세자와 불령봉표(佛嶺封標)
연경묘 향탄산인 계하 불령봉표
연경의 묘에 쓸 향탄(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조선 순조(제23대)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묘(묘호 연경)에 사용할 제수 경비를 마련하고자 했던 문자기록입니다.
조선 후기 어지러운 정세속에 부정부패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22세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슬픈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ㅇ 바위나 나무 줄기에 얼룩이 지니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마치 옷을 입은 듯 덮고 있는 생물이 있습니다. 이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의류라고 불리는 종류이며,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생물이랍니다. 열대에서 추운 북극지방까지 지구상에 넓게 분포하지만 대기오염에는 민감하여 깨끗한 지역에서 볼 수 있어요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수렛재 2.3km, 모차골 3.7km, 용연폭포까지는 0.2km이다. 이곳 이정목 표시가 잘못되었다. 용연폭포까지는 0.5~0.6km이상 거리다. 잘못된 표시는 초행길 탐방객에게 상당한 혼란을 줄 수 있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수렛재 2.5km, 모차골 3.9km, 용연폭포는 거리표시가 없다. 용연폭포의 거리가 명시 안된것은 이 부근이 용연폭포라는 착각을 할 수 있는데 용연폭포는 계속 직진해서 300~400미터를 더가야 한다.
ㅇ 자연속에 흐르는 신라 천년의 향기 '경주국립공원'
경주국립공원은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 20개 국립공원 중 유일한 사적형 공원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에 안은 토함산, 노천 박물관인 남산을 비롯하여 총 8개 지구이며, 아름다운 자연속에 신라 천년의 향기가 고스란히 전해 옵니다.
공원자원
- 지정문화재 : 61건(국보 12, 보물 24, 사적 9, 지방문화재 16)
- 세계문화유산 : 불국사, 석굴암, 남산
ㅇ 국립공원특별보호구 안내
이 지역은 특별히 보호해야 할 국립공원의 중요한 자연자원이 살아있는 지역입니다. 이들이 사람과 함게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용연폭포 일대가 독종개 서식지 보호지역이라 한다. 독종개는 멸종위기 2종 어류라고 한다.
ㅇ 옥대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하니 용연폭포(龍淵瀑布)
만파식적 대나무와 함께 얻은 또 하나의 검은 옥대
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옥대를 가지고 환궁할 때 마중 나온 어린 태자의 예지로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는 허리띠... 옥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ㅇ 옥대 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한 '용연폭포'
신문왕이 동해바다에서 얻은 만파식적과 검은 옥대를 가지고 궁으로 되돌아가던 길에 마중 나온 어린 태자(효소왕)가 예지를 발휘하여 옥대의 장식 하나를 떼어 계곡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전설에 등장하는 폭포가 바로 용연폭포입니다. 용연폭포는 함월산에서 흘러내린 호암천이 불국사 화강암 절벽에 걸려있는 폭포로 경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크기를 자랑합니다.
ㅇ 호국의 기상과 아버지를 위한 절 '감은사(感恩寺)'
지금은 석탑과 절터만 남아있는 감은사
문무왕이 통일신라의 위험을 세우고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짓기 시작하여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성하였으며,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감은사라 불렀습니다. 문무왕의 충의 뜻과 신문왕의 효의 정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 감은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동해안에 인접한 '대종천' 가까이 위치한다.
ㅇ 왕의 길에서 열어가는 새로운 길
신문왕이 행차했던 긴 여정 중 모차골에서 용연폭포에 이르는 숲 속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이 길에서 기원했을 호국의 꿈과 소망은 천 년을 넘어 많은 흔적과 신비로운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수많은 희생을 딛고 이룩한 대업, 삼국통일
신문왕 호국행차길은 부강하고 평화로운 새 시대를 열고, 아버지를 통해 강한 의지를 얻고자 했던 마음의 여정길이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ㅇ 신라를 지킨 또 하나의 힘 '대왕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왜적으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이 컸다고 합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뿌려진 곳이 감포읍 대본리 앞 바다 대왕암입니다.
문무대왕 수중릉은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며, 이곳에 깃든 호국의 마음도 세계 유일입니다.
ㅇ 왕의 길 안내
이 길은 신라의 시작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주던 길이다. 이 길은 사람과 문화를 이어주던 곳이지만, 왜구가 침략하던 주된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길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특히 이 길은 용성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잠입하던 길이며,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에게 신라의 보배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했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왕'과 '용' 그리고 '광명'과 '피리'이다. 이처럼 용이 왕이되고 왕이 용이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 신라 사직을 누천년에 이어가기 위해 미래의 비젼을 모색하던 길이 바로 이곳이다.
ㅇ 독중개
용연폭포를 지나 기림사로 내려오는 계곡, 일명 도통골은 독중개 최남단 서식지로서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독중개와 서식지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독중개는 냉수성 및 기후변화 민감종 어류로 여름에도 수온이 20도씨 이상 올라가지 않는 맑은 하천 상류에 서식합니다. 한국 고유종으로 산림벌채와 수질오염에 의하여 개체수가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한강, 낙동강 일부 수역에 드물게 분포합니다.
독중개
분류 : 척삭동물문 - 경골어류장 - 씀뱅이목 - 독중개과
크기 : 수컷 약 14cm, 암컷 약 15cm
먹이 : 물 속에 사는 곤충
산란시기 : 2~4월
서식장소 : 물이 맑고 수온이 낮은 하천 상류
ㅇ 천년 호국사찰 '기림사'
기림사는 천축국(인도)에서 온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라고 부르다가 선덕여왕때 원효대사가 확장하고 중수하여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전해오며, "신문왕이 판파식적과 옥대를 얻어 환궁할때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쉬어 갔다"라는 기록에 등장합니다.
신라 때부터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이었으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때 승병과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까지 오랜 세월 호국사찰의 역활을 하였습니다.
기림사는 직진하면 될것 같은데 왜 이정목에는 직진방향의 기림사 표시는 없고 왜 굳이 좌측으로 기림사 주차장을 표시할까 ? 아마도 탐방객들이 유료관람인 '기림사'로 무단 출입하는것을 간접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곳 삼거리에서 아무런 표시가 없는 방향으로 직진하여 250여미터 가면 기림사의 '명부전'과 연결된다. 빨간색 점선이 기림사로 직통길이고 파란 실선이 좌향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측 사진은 기림사 가람배치도이다.
ㅇ 북방 감로수
북암(감로암)의 암벽 아래로 지금은 봉해 놓았다. 차를 다스리면 그 맛이 뛰어나다 했으니 우윳빛이 돌아 유천(乳川), 단 맛이 나서 감천(甘川), 단이슬 감로와 같다해서 감로수(甘露水)다.
ㅇ 동방 오탁수(東方 烏琢水)
호암천 건너 옛 동암(東庵, 東溪庵)에 있었던 샘으로, 지금도 땅 속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까마귀가 암반을 쪼아대자 솟아 나와서 오탁수다.
ㅇ 기림사 연혁
함월산 기림사는 천축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이 창건하여 임정사라고 불렀다. 그 후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 때에 이미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으며,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을, 동쪽에는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리각을, 남쪽에는 무량수전과 진남루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대적광전은 보물 제833호로서 조선 후기 맞배양식 건물이며, 유물전시관에 모셔져 있는 건칠보상상은 보물 제415호로 반가상 형태를 취한 보기 드문 보살상이다. 또한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나타내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역시 대적광전에서 불사리와 함께 발견된 고려시대의 금은자사경들은 보물 제959호로서 기림사의 오랜 역사와 사격을 나타내는 성보이다.
ㅇ 기림사 오정수 祇林寺 五井水
기림사의 오방에는 다섯 가지 맑은 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은 옛 동계암 자리로,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대자 솟은 오탁수, 남쪽은 천왕문 앞 노송 아래로, 마시면 눈이 밝아 진다는 명안수, 서쪽은 화정단 앞에 지금도 흐르고 있는,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화정수, 북쪽은 북암(감로암) 암벽 아래로, 하늘의 밝고도 단 이슬과 같다는 감로수, 중앙은 응진전 앞 석탑 자리이니,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솟아나게 만든다는 장군수이다.
각기 불교 수행의 이치를 상징하기도 하는 오정수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화정수만 끊이지 않고 도량에 넘쳐 흐르고 있다.
ㅇ 함월산 기림팔경
1경 : 함월춘경, 2경 : 고사연우, 3경 : 호암추담, 4경 : 남암만설, 5경 : 용연비폭, 6경 : 오방감천, 7경 : 오색신화, 8경 : 죽림성차
진남루(鎭南樓)
진남루는 남방(일본)을 진압한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 요충지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 '호장안' 등 수많은 문헌들은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출처 : 기림사 홈페이지
ㅇ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기림사의 본전으로 신라 선덕여왕때 처음 지어졌으며 그 뒤 8차례나 다시 지어졌는데 1997년 8차에는 정부의 문화재 수리비용으로 완전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다. 대적광전은 주불이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적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은 그 세계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 (보물 제833호)
출처 : 기림사 홈페이지
ㅇ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 대의왕불이라고 한다. (경북문화재 제 252호)
ㅇ 응진전(應眞殿)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형태는 조선 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하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으로 서기 1729년 영조 5년때이다.
ㅇ 삼천불전(三千佛殿)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순조18년)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안에는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ㅇ 세수방
세수방 마을의 이름은 세수뱅이라도도 하며 야부내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라 신문왕이 이견대 앞바다의 섬에서 동해 해룡으로부터 검은 옥대를 얻어 오다가 이곳에서 세수를 하며 쉬어갔다고 한다.
궁성에 남아있던 왕자 이홍(효소왕)이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옥대를 구경하다가, 옥대의 비늘이 꼭 살아있는 것 같으므로, 그 중 하나를 떼어 거랑물에 던지니, 용이 되어 등천했다 하며, 그 자리는 파여 소가 되어 있는데, 이 소를 용추라고 부른다.
ㅇ 숯가마터
토함산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곳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아는 이가 없다. 주변으로는 숯을 구워내던 숯가마가 군데군데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숯을 구워 팔았다. 지금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불과 50년전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숯을 굽던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 오르던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숯 굽는 연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간첩들이 많이 내려오자 간첩에게 밥을 해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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