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영영의 보금자리
▣ 경산의 산/팔공산

팔공산 하늘정원 & 비로봉 & 오도암 & 제2석굴암 (4)

by 영영(Young Young) 2016. 4. 22.

 

 

 ▲ 오은사 ========================================================================

오도암 주차장(경북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산73-4)에서 약 7분(700m)쯤 동산계곡 방향으로 내려가면 오은사(경북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13번지)를 만나게 된다.
오은사는 1982년 지금은 열반하신 선묵스님이 창건하였고 태고종 종파이다. 원래 오은사를 원효대사님이 수련하던 오도암 자리에 세울 예정이었지만 오도암 자리가 너무 깊은 곳이라 일반 신도들이 왕래가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고찰은 아니지만 인근에 동산계곡과 하늘정원이 있기에 이와 더불어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 경내까지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만 잠시 보고 돌아나왔다. 입구에서 보는 오은사 대웅전은 팔공산 청운대를 배경으로 한마디로 웅장하고 부티난다는 느낌이다. 



 ▲ 사찰 입구 주차장과 사찰로 들어가는 길을 돌축대를 쌓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  청악교 =====================================================================

오은사를 지나 2~3분쯤 동산계곡쪽으로 내려가면 크지않은 다리 "청악교"를 만난다.
오도암 가는길목에 있는 청운정에서 아래를 보면 보이는 건물이 무엇일까 궁금증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청악교를 찾게 되었고, 또 청악교를 인터넷에서 검색한바, 2005년도 매일신문에 이곳 청악교에서 오도암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매일신문의 청악교, 오도암과 오도굴(현재의 원효굴)에 대한 기사이다.

원문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h_753&logNo=10034511217)


원효가 팔공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34세 이후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산에서 가까운 경산 출신이기도 했던 설원효 스님은, 34세 때 당나라로 가다가 붙잡혀 귀환한 뒤 다시 유학하러 떠나던 44세 사이의 상당 기간을 팔공산에서 수행했다는 것이다. "불굴사 석굴에서 수도한 뒤 오도굴에서 득도했다는 것이 골간이다.

불굴사 석굴은 지금도 그 모습이 선명히 유지돼 있으니 더 살필 일이 없을 터이다. 무학산에 가까이 위치한 이 석굴은 마침 팔공산권 중에서도 원효의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팔공산 정상부 산성봉의 서편 '청운대' 절벽에 있다는 '오도굴'이 어느 것인지는 확정하기 쉽잖아 보였다. 동산계곡 청악교 부근에서 접어들어 도달하는 오도암 뒤 절벽에 있다는 점에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일치되고 있었으나 그 이상의 세세한 부분에서는 이야기가 엇갈리기 때문이었다.

1988년 10월 당시 한 문화동우회는 오도굴이 절벽의 꼭대기 부분에 있더라고 답사 결과를 전했었다. "굴은 일부러 판 것으로 보이고, 입구 높이 80cm, 길이(깊이) 2.8m였으며 입구 절벽엔 서(誓) 무엇 무엇이라고 글자 석 자가 파여 있었다"는 것이 그때 설명된 모습.

그러나 인접 마을 출신으로 오도암 터에 10여 년 살았고 지금도 인근에 거주하며 '공부'를 해 '도사'로 불리는 한 어르신의 설명은 달랐다. 석굴이 절벽의 하단, 오도암 바로 뒤의 어느 부분에 있더라고 했다. "사각형에다 천장 부위가 아치형인 입구를 가진 큰 굴이었다" "그 복판 바닥 암반에 두 사람이 목욕할 만큼 큰 깊이 1m 가량의 절구형 홈이 파였으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로 가득 찬 그 홈 밖의 빈자리도 5, 6명은 충분히 앉을만한 크기였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었다.

이런 설명들을 길잡이 삼아 취재팀이 청운대 절벽에 접근했더니, 접근로부터가 증언들과 달라져 있는 듯 했다. 옛날 사람들이 오도굴로 다니던 길은 오도암 뒤로 나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의 길은 암자 앞마당을 통해 절벽으로 접근토록 돼 있었다. 그걸 따라 청운대로 접근했더니, 나무 등등의 자재로 근래에 만든 인조 '토굴'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수행자들은 요즘도 그런 공간을 좋아하는 듯 했다. 그걸 지나자 길은 끝났고 그 나머지 구간은 수직 상승해 절벽을 올라가도록 돼 있었다. 그 출발점에는 암벽등반용 밧줄이 수십m 높이에서 내려 와 있었다. 하지만 그 밧줄은 절벽 위로 오르내리기 위한 수단일 뿐 오도굴로 가기 위해 설치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설명된 그 어느 굴도 취재팀은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어쨌건, 오도굴 같이 신령스런 분위기의 석굴들을 놓고 김유신과 원효의 이야기가 뒤섞여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 듯 보였다. 팔공산의 주인공이 김유신에서 원효로 대체되는 양상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고, 김유신으로 구상화됐던 '산신'이 원효로 대리되는 '부처님'에 의해 치환됨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산신-장군 등의 토속신앙이 점차 불교신앙으로 대체돼 가는 큰 흐름이 그 속에서 짚이는 것이다.



 ▲ 청악교 부근의 무지개 가든 식당



 

 ▲  모암기(慕庵記)



 ▲ 동산계곡, 동산교



 

 ▲  제2석굴암 ==================================================================

오도암 주차장에서 제2석굴암 주차장 까지 5.6km(17분)를 달리면 경북 군위군 북계면 남산리 302번지에 위치한 제2석굴암(군위 삼존석불)을 만날 수 있다. (오은사에서는 삼존석불까지는 5.0km, 승용차로 14분 소요)
설굴암 인근 전용 주차장에 주차후 석굴암까지 걸어가야 하지만 오늘은 인파가 많지 않아 석굴암 코앞까지 승용차를 몰고 양산서원 앞 다리부근에 주차했다. 석굴암은 양산서원 앞에서 오른쪽 3층 한옥건물 방향으로 가야하지만 주변을 먼저 돌아보고자 서원 앞으로 흐르는 개천을 따라 반대방향으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 석굴암의 반대방향, 개천으로 접어들어 돌아본 모습이다.



 ▲ 개천을 따라 정자와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 200여미터쯤 가지 않아 목교와 그 우측 정자 하나가 보인다.



 ▲ 목교의 상류에는 소가 있고 목교 건너 정자가 있다.



 

 ▲ 척서정(陟西亭)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경재의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척서정
경재는 문하사인(門下舍人:고려 종4품 벼슬로 사인(舍人)으로도 불림)으로 근무하다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고향인 부계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했다.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온 그는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면서 다시는 조정에 나갈 뜻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에 '경재(敬齋)'라는 편액을 걸고 선비의 본업에만 전념했다.  1392년 7월4일(음력)에 병을 얻었으나 어버이 마음을 다치게 할까 염려해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달 17일에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자 가족이 만류했다. 그러나 "내가 밤중 꿈 속에서 태조 왕건을 만났소. 오늘이 돌아갈 날이오"라 하고 관복을 갖추어 입고 사당에 배알한 다음 부친 진사공(進士公) 홍민구 침소에 들어가 절한 뒤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를 편 뒤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는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나이다. 죽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臣與國偕亡, 死亦何言)"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침소에 들어 조용히 운명했다.
 그날 오전 사시(巳時)였고, '열혈청년(熱血靑年)'의 꽃다운 나이 27세 때였다.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의 제2석굴암 위쪽 계곡 옆에 자리한 척서정(陟西亭)은 후손들이 경재의 절의정신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병유가 지은 척서정기문에 의하면, '수산(首山)과 양산(陽山)의 중간 지점에 예전에는 경재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제향을 올렸으나 없어지고, 그 유허지에 척서정을 지어 절의를 추모하고 있다'고 전한다.



 ▲ 정자는 문이 잠겨있어 아쉽게도 내부는 볼 수가 없었다.



 ▲ 정자 앞에서 빠꾸하여 석굴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고목나무 한그루를 만나고 ~



 ▲ 고목나무 오른쪽에 양산서원이 있다. 양산서원은 조선 정조 때 설립됐지만 고종 5년 서원 철폐령으로 모든 건물이 훼철되는 비운을 겪고, 이후 1948년 양산서원 유허에 강당만 지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014년에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복원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 양산서원(陽山書院)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이 서원은 1786년 정조(正祖) 10년에 설립된 지방교육기관이며 성현(聖賢)을 존숭(尊崇)하던 곳이다. 이 고을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세거지(世居地)로 고려말이 충신 문하사인(門下舍人) 경재(敬齋) 홍노(洪魯)선생과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朝鮮朝 左參贊 兼 兩館 大提學)을 역임한 시호(諡號) 문광공(文匡公)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선생, 이좌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한 대학자 우암 홍언충(大學者 寓庵 洪彦忠)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분 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한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흥교당(興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立懦齋), 구인재(求仁齋), 읍청루(?淸樓), 반무당(半畝塘) 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 고종(高宗) 5년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후 1897년 광무원년(光武元年)에 현 규모의 강당을 중건한 후 1989년에 중수를 하고 강당 후정에는 장판각(藏板閣)을 지어 경재 선생 실기(實記)목판과 조선조 후기 사학자이며 성리학의 대가인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선생이 수찬한 휘찬려사(고려사)[彙纂麗史(高麗史)] 목판(경북유형문화재 251호)을 보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 팔공산 전통문화 교육원
양산서원의 오른쪽에 위치한 웅장하게 보이는 3층건물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 관에서 운영? 종단에서 운영?  교육원 오른쪽에 보이는 산 절벽에 석굴이 있다.



 ▲ 석굴쪽으로 진행하면서 돌아본 교육원 건물의 모습이다. 웅장 그자체이다.



 ▲ 팔공산석굴암중창공덕사적비
시주많이 한 사람들 명단 적어 놓은건가?



 ▲ 비로전(毘盧殿) 법당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가장 큰 전각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지만 비로자나불(모든 부처의 진신[眞身]: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을 모시는 경우에는 ‘비로전’으로 명명한다고 한다.  비로자나란 무한한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 모전석탑(模塼石塔)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분황사 모전석탑이 유명하다. 통일신라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암의 모전석탑은 원래3층이었는데 탑신부에 자생한 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탑도 같이 무너졌는데 1949년 당시 창건주가 주선하고 신도들의 힘을 모아 현재 모습데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모전석탑 뒤에 둥근모양의 석굴이 보인다.



 ▲ 옛날에는 가까이 접근해서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석굴암 정면을 나름 가까이서 볼 수 있는것이 지금의 위치다.

오랜 세월을 수직 암벽 나무틈에 꼭꼭 숨어 있던 군위삼존석굴이 세상에 존재를 알린 것은 불과 백년 남짓이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1927년 11월 20일 군위군 부계면 한밤 마을에 살던 최 모 씨가 마을 앞 돌산 꼭대기 소나무에 밧줄을 매고 절벽을 내려가 수직으로 뻗은 절벽 나무틈에서 석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발견 후에도 40년 넘도록 세상에 묻혀 있다가 1962년이 돼서야 세상에 알려져 국보 109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돌계단이 축조되어 있지만 당시는 까마득한 절벽 20m를 오르내리는 밧줄 사다리 하나가 전부였으며 집도 절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는데 1963년 故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당시 돈으로 삼천만원을 시주한 돈으로 계단도 올리고 주변 정비도 했다고 한다. 그후 1985~86년 이후 비로전, 교육원 등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복전함 앞에서 줌 ~
제2석굴암(군위 삼존석불)
천연절벽의 자연동굴(지상 6M)속에 만들어진 이 석굴사원의 입구는 높이 4.2M, 굴속 길이는 4.3M로 인공적 석굴사원인 경주 석굴암보다 조성연대가 1세기 정도 앞선 것으로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굴안에는 통일신라 초기, 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존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본존불인 중앙의 여래상은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인 장중한 위엄을 갖추고 항마촉지인을 하였으며 통견의 얇은 법의를 입고있다. 좌우의 협시불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목,허리,다리에서 살짝 굽어진 삼곡자세를 하고있다. 세련된 옷주름과 왼쪽 보살상의 정연한 보주형 두광은 통일신라 조각예술의 사실적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존 여래상의 상현대좌와 보살상의 복련대좌와 부드러운 선각등에는 삼국시대 조각예술의 상징성도 엿볼 수 있다.



 ▲ 삼존석불로 가는 석불교에는 1963년 8월에 준공하였다고 음각 표시되어 있다.
그때면 내 나이 세살때,,,,



 ▲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차단되어 있고 그 앞에 안내문 한개가 서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석굴 가까이의 관람을 제한한다는 말씀이다. 단 참배는 가능하단다.



 ▲ 삼존석굴 안내판
훼손되어 보기에 좀 불편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존석굴 안내
국보 제109호(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동 302번지)
이 위의 천년절벽 자연 동굴안에 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위시하여 왼쪽에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는 대세지 보살이 안치되어 있다.
나무라는 말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은 이곳으로부터 십만의 국토를 지나가면 서방정토 극락세계라는 세계가 있는데 그곳의 교주이신 부처님의 명호이며 혹은 부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관세음 보살은 대자대비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보살의 이름이며 세간의 모든 고통의 소리를 관철하여 수고중생을 구제하므로 관세음 이라하며 대세지 보살은 지혜의 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비치어 삼제(지옥, 아귀, 축생)를 여의고 위 없는 힘을 함께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 하며 보살이란 말은 나를 희생하면서 남을 위하는 정신을 보살이라 한다.
이 석굴은 지금으로부터 1550년 전에 아도화상께서 수도전법 하시던 곳으로 일명 아도굴이라 하며 그후 신라의 원효대사께서 미타삼존을 조성 봉안하시고 해동 제일의 석굴사원으로써 신라불교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이 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약 1세기 정도 앞선 선행양식으로 토함산 석굴암 조성의 모태가 되었다.
임신년 중추절 석굴암 합장



 ▲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갈이 살다가 가라하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 (懶翁禪師)의 선시라고 한다.



 ▲ 문화재 표지석은 아마도 국보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09호 군위삼존석굴"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 석굴로 가는 다리 이름이 석불교이다. 반대편에 1963년 8월에 준공하였다고 음각 표시되어 있다.



 ▲ 1986년에 세운 안내판이니 30년이 된 안내판이다. 설법전과 연수원 건립 기와불사에 동참해 달라는 안내문이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
9세기 후반의 불상, 삼라만상의 원칙을 불교에서는 법으로 표현하며 법을 부처로 형상화한것이 비로자나불이다. 일부 파손된 대좌는 사찰에서 보존하고 있다고 하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 불상 오른쪽에 안내문이 서있다.


▲ 팔공산 석굴암 안내판. (2016. 5. 1  재방문시 사진임)

 

 

▲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2016. 5. 1  재방문시 사진임)

 

 

▲ 석굴암내 연못. (2016. 5. 1  재방문시 사진임)


 

 ▲ 극락교



 ▲ 극락교 아래를 흐르는 개천



 ▲ 석굴암 종합안내도



 

 ▲ 팔공산 석굴암 맞나?
팔공산 석굴암에는 볼거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별도의 입장료도 없다. 이제 집으로 간다.



 ▲ 귀가길 한티휴게소



 ▲ 귀가길 불로삼거리


집에서 근 50km쯤 떨어진 팔공산 하늘공원과 비로봉, 오도암, 군위 제2석굴암 등을 돌아보았다.  산행이라기 보다는 산책과 유람같은 오늘은 누군가 같이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