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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대구의 산/대암봉-요령봉-능천산

대암봉-옻골재(옥곡재)-요령봉-능천산 (1)

by 영영(Young Young) 2009. 5. 9.

 09. 5. 2(토), 석가탄신일, 구름가끔, 바람조금, 후덥지근

ㅇ 토욜이라 애들을 비롯 식구들 모두가 늦게까지 잤다. 아침을 늦게 대충 챙겨묵고 집 식구와 함께 짜근넘을 수성구 공부터에 태워준뒤에 어느분이 추천해주신 대구 동구 둔산동에 있는 대암봉으로 향했다. 집 식구가 감기.몸살중이라 산도 산이지만 산 아래에 있는 최씨종가 마을인 옻골마을을 돌아볼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최씨종가를 돌아보고 마을입구 왼쪽으로 이어진 대암봉을 올랐지만 집식구의 감기.몸살로 결국 생구암 직전에서 싸가지고 간 김밥과 참외, 오징어 등으로 배만 채우고 바꾸했다.

 

09. 5. 7(목), 구름가끔, 후덥지근, 황사

ㅇ 지난 5. 2일날 집사람하고 대암봉을 오르다 말았기 때문에 오늘 혼자서 다시 대암봉을 찾아 나섰다.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곧바로 반야월로 향했다. 경주최씨 종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대암봉-옥곡재(옻골재)-요령봉-능천산을 돌아보고 상매동과 상동을 거쳐 옻골 주차장으로 회귀하였다.

ㅇ 대암봉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대구공항과 옻골마을 바로뒤(팔공산과 대구공한 사이)에 위치한 해발 465미터 산으로, 산 입구에서 대구사적 1호로 지정된 최씨종가를 둘러볼수 있고, 생구암과 대암봉 정상을 오르는 길에 대구공항, 대구스타디움 등 대구시내의 전망이 좋고 팔공산 주능선을 가장 잘 볼수 있는곳이기도 하다. 조용하면서도 가볍게 산행 할수 있는 편안한 산이지만, 대암봉에서 옻골재(옥곡재)와 요령봉, 능천산을 거쳐 한바꾸 돌게되면 오솔길이 있고 바윗길도 있으며, 특히 요령봉의 전망은 탁월하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은 코스다.

 

▼ 오늘 돌아본 산행 코스다. 그림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다.

 

 ▼ 다른분의 블로그에서 차용한 산행지도이다.

 

 

 

 ▼ 아래 지도도 다른분의 블로그에서 차용한것인데 오늘 본인이 돌아본 코스와 같다

 ▼ 아래의 안내판은 대암봉 정상에서 용암산 방향으로 약 200미터쯤 가면 만날 수 있다.  

 ▼ 아래 지도들은 다음지도, 네이버지도, 알맵, 홀씨지도에서 캡쳐한 사진이다.

 

 

 

 ▼ 방촌역에서 옻골마을로 가면서 바라본 모습이다. 대암봉과 요령봉 능선이 보인다.

 ▼ 대구해안초등학교의 왼편으로 진행한다.

 ▼ 해안초등학교의 표지석 옆에 둔산동경주최씨종가 안내판이 서있다.

 

 ▼ 옻골마을로 좀더 진행하면 대암봉이 좀더 뚜렷하게 보인다

 ▼ 경주최씨종가 옻골마을 주차장이다. 안내석과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이 있다.

 

 ▼ 옻골마을 돌담길은 2006.6월경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보존 관리하고 있다는 안내석이 있다.

 ▼ 주차장내에 있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인데 최씨종가와 옻골에 대한 팜프렛을 나눠주고 궁금한것이 있으면 도움을 받을수도 있다.

 ▼ 주차장에서 옻골마을로 몇걸음 옮기면서 바라본 대암봉과 생구암의 모습

 ▼ 주차장을 지나 몇걸음 옮기면 커다란 나무들이 서있다.

 ▼ 옻골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최씨종파인 칠계파의 연못과 수목을 보수한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가 보호수 옆에 서있다.

  ▼ 대구시 둔산동 340번지, 수령 약 380년된 느티나무

  ▼ 음의 기운을 막기위해 마을입구 서쪽에 느티나무와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 또한 풍수지리학적으로 물이 필요하다고 하여 마을입구 서쪽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 숲과 연못을 지나면 곧바로 마을입구다

  ▼ 마을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골이라 불리었다고 하며 현재는 경주 최씨 광정공파 칠계파(漆溪派)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동성촌락(同姓村落)으로 현재 20여 호의 고가들로 어우러져 있다.

둔산동 경주최씨 종가 및 보본당사당 (屯山洞慶州崔氏宗家-報本堂祠堂 )

ㅇ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
ㅇ지정번호 : 대구민속자료 제1호
ㅇ지정연도 : 1982년 3월 4일
ㅇ소재지 : 대구 동구 둔산동 386
1982년 3월 4일 대구광역시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학자 최동집(崔東集)이 1616년(광해군 8) 무렵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집이다. 살림채는 1694년(숙종 20)에 지은 안채와 1905년(고종 42)에 중건된 사랑채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박공지붕집이다. 살림채 동쪽에 있는 보본당(報本堂)은 1742년(영조 18)에 지은 것으로 재실로 사용된다.

안채의 동쪽과 보본당 뒤쪽에 인접하여 가묘(家廟)와 별묘(別廟)가 흙담장으로 된 한울타리 안에 배치되었는데, 최동집과 정조 때 학자인 최흥원(崔興遠)을 배향하였다. 가묘와 별묘, 보본당으로 이어지는 조상과 관련된 공간은 양의 상징적 의미인 동쪽에 배치하고, 생활공간인 살림채는 음의 상징인 서쪽에 배치함으로써 풍수지리설 및 음양오행설을 반영하였다.

대구지방에 있는 조선시대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시대의 양반주택과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최동집 나무의 유래

최동집(1586~1661)의 호는 대암이며 아버지 최계는 임란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분이다. 한강 정구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광해군 8년(1616년)에 이 둔산동 칠계(漆溪), 즉 옻골에 정착했다.

효종이 대군으로 있을때 스승으로 천거되었으나 중도에서 체입되고 명(明)이 망하자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자처하며 부인동에서 은거하여 평생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가르치고 주민을 교화했다.

이 마을은 민속자료 제1호로 그가 살던 집은 현존하는 민가로서는 가장 오래되어 조선시대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령 350년된 이 회화나무는 경주최씨 대암공파(臺巖公派)의 피조이자 지역사회 문풍진작에 크게 기여한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최동집 나무라 이름지었다

 

  ▼ 최홍원 정려각(旌閭閣) :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0호

마을 제일 앞쪽에는 정려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 정조 임금 때 세자의 익찬(임금의 정사를 잘 도와서 인도함)이었던 백불암 최흥원 선생의 효자비각으로, 선생의 생존 시 효성을 기려 선생의 사후인 1789년 나라에서 세운것이라 한다.

각 안에는 정조대왕이 하사하신 홍패가 걸려 있다.

'최흥원(崔興遠)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경주.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 일찍이 이상정(李象靖)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교관(參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거쳐 1784년(정조 8)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좌익찬(左翊贊)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연구에 열중하여 후에 칠계(漆溪)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백성들의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워 강학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고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 안정을 얻게 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유명한〈부인동규(夫仁洞規)〉였다. 죽은 뒤 1789년(정조 13)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고, 이듬해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百弗庵集)」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왜 그는 환갑 때 호를 백불(百弗 - 일백 백, 아닐 불)이라고 지었을까?
여기서 백불(百弗)이란 ‘백부지(百不知) 백불능(百弗能)’ 모든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또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서 조선 후기 학문과 그 실천에 누구보다 헌신했던 올곧은 학자의 정도를 넘은 겸사(謙辭)가 강하게 담겨 있다고 한다.

   ▼ 백불고택 수구당 -사랑채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

 경주최씨 칠계파 종가 백불고택의 사랑채 격인 수구당은 ‘-‘자형으로 지어진 건물로, 음의 상징인 서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동산서원이 훼철될 때 나온 목재의 일부를 사용해 1866년에 중건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그리고 지붕의 높이가 다른 것은 '장유유서' 정신을 살려 윗대를 공경하라는 정신이 깃든 흔적이라고 한다. 

지금은 9대 종손인 최진돈씨 부부와 모친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함.

 

 

 

  ▼ 최씨종가를 돌아봤으니 이제 대암봉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돌아나와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 대암봉 초입은 최씨종가에서 되돌아 나와 시멘트 포장도로로 들어선다.

  ▼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서서 몇걸음 뒤에 왼쪽 산기슭으로 올라붙는다.

  ▼ 산 입구에는 먼저 다녀간 분들의 시그널이 붙어있다.

  ▼ 어느 등산로나 마찬가지지만 여기에도 "산불조심" 플랑카드가 있다

  ▼ 등로의 좌측에 제법 모양을 갖춘 묘지가 있는데, 사진에 있는 묘지외에도 이곳까지 오는중에 몇기가 더 있었다.

   ▼ 참나무를 잘라서 맹글어 놓은 의자들이 등로 옆에 설치되어 있다.

   ▼ 헬기장 도착

 

   ▼ 헬기장에서 대암봉 방향 등로의 왼쪽에 삼각점이 있다.

 

 

   ▼ 헬기장을 지나면 나무를 잘라서 만든 의자와 훌라후프가 있는 쉼터를 만난다.

   ▼ 쉼터에서 오른쪽 옻골로 내려가는 자그마한 길이 있다

   ▼ 쉼터에 거울이 있었는데, 거울앞에서 한캇

 

 

   ▼ 나무를 잘라서 대충 만든 자리같지만 오히려 이런것이 더 정감스럽다

   ▼ 갈림길

왼쪽길은 생구암을 생략하고 대암봉으로 바로가는 우회로이다. 오른쪽으로 좀더 경사가 급한길로 오른다.

   ▼ 경사가 제법 있는 좁은 돌길을 따라 오른다.

   ▼ 절개지 아래 도착. 옻골마을이 바로 발아래 내려보인다.

 

 

   ▼ 절개지 아래, 이곳 고도 359미터, 대암봉 정상보다는 약 100여미터 낮다.

   ▼ 현재 서있는 절개지를 산행 초입부에서 바라본 모습

   ▼ 멀리 대구스타디움(구 월드컵경기장) 지붕이 보인다

   ▼ 절개지에서 100여미터를 오르면 ~

   ▼ 능선 봉우리(쌍여봉)에 도착.

며칠전 집식구와 여기까지 왔다가 되돌아갔다. 이곳에서는 옻골과 토골 뒤로 이어지는 전망이 탁월하지만 정작 중요한 생구암은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생구암은 이곳 봉우리에서 불과 20여미터 후방에 있지만 모르고 그냥 하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