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영영의 보금자리
▣ 둘러보기

청라언덕 야간산책

by 영영(Young Young) 2022. 8. 16.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 덩굴'이란 뜻으로, 당시 박태준이 다니던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그리고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작곡가인 박태준(朴泰俊, 1901. 1. 12 ~ 1986. 10.20)선생이 계성학교 시절(1911년~1916년) 신명여학교로 통학하는 소녀를 짝사랑한 적 있는데, 이때의 감정을 나중에 동료로 근무한 작사가 이은상에게 말해서 1922년 '동무생각’(思友)'이라는 가곡을 작곡했는데 여기에 청라언덕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청라언덕역의 유래가 되었다.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화의 빛이 태동한 곳으로,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지금의 동산의료원이 사회에 봉사하면서 성장한 중심지이다. 

 


청라언덕은 조선 시대인 1899년 대구 최초로 서양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동산땅을 매입 하고 서양식과 한옥을 겸한 살아갈 집과 병원 학교 등을 지어 선교와 의료 교육 으로 대구 근대화의 초석이 된 곳이다.

 


선교사들은 낮선 대구에 기독교를 세웠고 젊음과 인생을 바친 동산은 100년 뒤인 1999년 선교사들의 집은 박물관으로 지정 되었고 대구의 주요 여행 상품이 되어 대구시 유형 문화재 24호.25호. 26호로 지정 자랑스러운 여행 코스가 되고 있다.

 

 

 

 

▲ 청라언덕으로 통하는 길은 여러군데가 있는데 청라언덕의 동편인 3.1만세운동길의 90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 90계댠의 입구에는 '근대문화골목'을 안내하는 현판이 서있다. 이곳에서 근대문화의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청라언덕과 반대편으로 190미터 떨어져 있다.
▲ 현대식 가로등 보다 청사초롱과 전구 불빛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 90계단길에는 서문시장과 신명학교 등 근대문화의 흔적을 소개하는 사진이 걸려있다.

 

 

3.1만세운동길은 3.1운동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서 도심으로 모이기 위해 통과했던 솔밭길이라고 한다. 대구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 3월 1일 보다 늦은 1919년 3월 8일 오후 큰장(현 섬유회관 건너편)에서 학생과 교회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 솔밭길은 배움을 실천하고 민족의 정기가 배어있는 곳으로 대구시에서 2003년 이곳을 '대구 3.1운동길'로 지정하고 3.1운동당시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사진들을 발굴, 전시하여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 90계단을 올라서 몇걸음 직진하면 청라언덕 안내판이 서있다.
▲ 청라언덕 안내판을 보면 3.1만세운동길이 서문시장으로 직진으로 연결되고 그 좌우로 선교사 주택을 비롯한 유적들이 자리잡고 있다.

 

3.1운동길의 좌편에는 선교사 주택 2곳과 두 주택 사이에 대구동산병원 구관 현관과 박태준 선생의 노래비가 서있다.   

위 사진의 현관은 제중원(1899년)을 전신으로 한 대구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대구 동산병원 구관은 제2대 동산병원장 플렛쳐가 1931년 신축했으며,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대구 동산병원 구관은 대구최초의 서양의학병원으로 1941년 태평양 전쟁중에는 경찰병원으로 사용되었고 1950년 6.25전쟁시에는 국립경찰병원 대구분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축물은 중앙의 돌출된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대구 향토 및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0년 대구도시철도 3호선 공사로 인하여 현관 부분만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 현지 안내판 옮김 - 

 

 

 

▲ 대구 동산병원 구관 현관 오른쪽에 박태준 선생의 '동무생각' 노래비가 서있다.

 

 

청라언덕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이 '동무생각(思友)'이다. 
바로 이곳이 푸른(靑) 담쟁이(蘿) 넝쿨이 휘감겨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란다. 박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 곳에 노래비를 세운다. 
이 언덕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길 기원하면서... 
2009년 6월 
대구중구문화원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금씨 석저 추진호  

 

- 현지 노래비 내용 옮김 - 

 

 

▲ 볼레어 선교사 주택과 챔니스 주택 사이에도 청라언덕 안내판이 하나 서있고 ~
▲ 동무생각 노래비 오른쪽에 위치한 볼레어 선교사 주택을 먼저 돌아본다.
블레어 선교사 주택은 현재 교육.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볼레어 선교사 주택은 1910년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이다. 2층인 이 집은 남북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를 이루고 있다. 1층의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고, 그 오른쪽인 집의 중안에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자리잡고 있다. 거실과 응접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침실,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고 현관홀 위에는 늘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을 설치했다. 건물은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이 집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당시 미국의 주택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건물이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6호   - 현지 안내판 옮김 - 

 

 

▲ 블레어 선교사 주택 주위의 조경
▲ 블레어 주택의 좌편, 대구동산병원 구관 현관의 왼쪽에는 챔니스 선교사 주택이 위치하고 있다.
챔니스 선교사 주택은 현재 의료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챔니스 선교사 주택은 1910년경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거주하기 위해 지은 주택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때) 가져 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국식으로 쌓았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남북 쪽으로 약간 긴 네모 형태를 갖추고 있다. 1층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이 홀을 중심으로 거실, 서재,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의 부속공간을 마련했다. 1층 동남쪽에는 거실 등에서 이용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베란다를 시설하였다. 이러한 건물의 양식은 당시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 풍으로 지금까지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 현지 안내판 옮김 - 

 

 

▲ 90계단을 올라 서문시장으로 연결된 3.1운동의 길
▲ 3.1운동의길을 횡단하여 선교사 스윗즈 주택으로 ~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현재 선교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스윗즈 주택은 1893년부터 대구를 찾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1910년경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인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거실, 응접실로 직접 연결되며,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 침실 등이 있다. 2층은 계단홀을 중심으로 남쪽에 2개의 침실과 북쪽에 욕실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내부구조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대구의 초기 서양식 건물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현지 안내판 옮김 -

 

 

▲ 스윗즈 주택 왼쪽에는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이 걸린 담장이 있는데 ~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철거한 본원의 유서깊은 정문 및 중문 기둥과 담장을 여기에 옮기어 세웠고, 그 위에 본원의 초창기에 개척한 수많은 교회의 종들 중 하나를 올려 놓았다.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두 기둥은 환자를 돌보는 교직원들의 사랑의 손길을, 보도에 놓은 다듬이돌들은 본원이 하나님 나라의 화장에 디딤돌임을 상징한다. 1999. 10. 1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장     - 현장 안내판 옮김 - 

 

 

▲ 포토죤
▲ 제일교회 옆에 위치한 '여호와 이레의 동산' 표석

 

이곳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로서 19세기 말 이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대구를 선교지로 선택하여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담스, 존슨, 브루언 세 분의 선교사가 남문 안에 있던 선교본부를 이곳으로 옮기며, "우리가 선 땅은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이레의 땅"이라고 외쳤다. 브루언은 당시 대구의 읍성을 바라보며 "다윗의 망대가 서있는 예루살렘" 같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처럼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 학교, 병원이 설립되었고 대구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컫는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  - 표지석 내용 옮김 -

 

 

▲ 청라언덕을 돌아보고 대구제일교회 앞을 지나서 ~
▲ 청라언덕을 내려와 계산성당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3.1만세운동길(90계단)을 새긴 돌이 바닥에 놓여있고 그 옆에는 근대골목 밤마실 투어 홍보판이 서있다.

 

▲ 도로 건너에는 대구 최초의 가톨릭 성당인 계산성당이 위치하고 있고 ~ 대구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대구제일교회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서성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길건너 약령서문이 나타난다.
▲ 신남네거리(청라언덕역)에서 집으로 향하며, 와이푸와 가벼운 산책 마무리 ~

 

 

 


 

 

아래는 청라언덕 문화관광해설사의 집에 비치된 팜프렛을 스캔한 것이다. 

 

 

 

'▣ 둘러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성토성마을  (2) 2022.09.18
달성토성(達城土城)  (0) 2022.09.12
2022년 8월의 성주 성밖숲  (0) 2022.08.12
대구서문시장(西門市場)  (0) 2022.08.06
부산 이기대공원&오륙도스카이워크  (0) 2022.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