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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문시장(西門市場)

by 영영(Young Young) 2022. 8. 6.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도보거리 300여미터 거리에 대구 최대의 재래시장인 서문시장이 있다. 서문시장과 가까운 대단지 아파트라 서문시장 상인들의 아파트라 할 만큼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나와 같은 아파트 같은동, 같은층에도 나머지 2세대 모두가 서문시장에서 업을 하고 있다. 

 


새롭게 이사 온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과일이나 음식도 나누어 주고 살갑게 대해주어서 옆 세대 가게를 두어번 이용하기도 했고 앞으로도 이용 할 생각이다. 

 


이사온지 만 2개월이 막 지났다. 
일상운동과 산책으로 늘 서문시장을 경유해서 달성토성(달성공원)을 다녔기에 서문시장을 여러차레 지나쳤지만 오늘에야 서문시장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었다. 

 

 

 

 

 

 

■ 개요
서문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있는 시장이다. 대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래시장으로 전국 3대 전통시장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5일장으로 시작했으며 과거에는 ‘대구장’이라 부르다가 17세기 대구읍성 서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문시장은 전체 6개 지구로 구성된다. 6개 지구는 1지구, 2지구, 4지구, 5지구, 동산상가, 건해산물상가 등이다. 2016년 기준 서문시장에서 영업하는 점포는 4,600개 이상이며 상인 수는 약 2만 명이다. 시장에서는 주단과 포목 등 섬유 관련 품목과 한복, 이불, 의류, 그릇, 공예품, 청과, 건어물, 해산물 등 다양한 상품을 거래한다.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상가 및 점포마다 차이가 있다. 쉬는 날은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이다.

 


■ 형성 및 변천
시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15~16세기 조선 중종, 명종 시대다. 당시에는 규모가 작은 읍성 향시(鄕市)로 대구군읍성(大丘郡邑城) 북문 밖에서 5일장 형태로 열렸다. 거래 물품은 농산물과 가축 등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경상좌·우도가 통합되자 시장의 입지도 달라졌다.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근무하는 관청인 감영이 대구읍성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대구는 영남지방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당시 대구장이라 불리던 시장은 1679년(숙종 5) 경상도의 대동법 시행 전후로 경상감영(慶尙監營) 서문 밖 인교동 근처로 이전했다. 대구 서문시장이란 이름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특히 대구 지역에 육로와 낙동강 수운이 발달하면서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전주, 평양과 더불어 3대 향시(鄕市)로 꼽힐 만큼 번창했다.

19세기에는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향시가 개설되었다. 당시 열린 시장으로는 화원장, 상시장, 매원장, 자인장, 대구동문시장, 남창장, 하양장, 하빈장, 경산장, 해안장, 칠곡장, 반야장 등이 있다. 서문시장을 포함한 대구향시권은 성주나 영천, 경주, 의성, 안동 등의 향시권과도 빈번하게 교류하여 수많은 물품이 오갔다. 당시에는 왜물(倭物)을 포함해 서문시장에서 사지 못하는 물품이 없었다고 전한다.

 


■ 발전원인
서문 밖으로 이전한 대구서문시장은 1923년부터 오늘날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이사하기까지 200여 년 동안 그곳에 정착하면서 놀랄 만큼 발전하여, 조선 후기 우리 나라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번창하였다. 그 원인은 다음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① 감영이 정착함으로써 대구가 영남지방의 정치중심도시로 승화하였다. 이에 따라서 각급 관인들의 수효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각급 관인과 일반백성들이 빈번하게 나들이하게 되었다. 사람은 어디서나 먹고 입어야 살 수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물자를 소비하게 마련이므로 이를 공급, 수요할 수 있는 곳이 곧 서문시장이었다.

② 교통이 매우 편리하였다. 대구는 천혜적으로 경상도의 심장부에 있으면서 육로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이었고, 낙동강 수운은 좌·우도 통합 이래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북녘(상류쪽)으로는 경상도 북부일대의 물자를 손쉽게 이곳으로 운송할 수가 있었고, 남녘(하류쪽)으로는 남해의 해산물과 왜물(倭物)이 실려 들어왔다. 왜물 중 그리쇠[鋼鐵]·납·유황·단목(丹木) 등과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③ 대동법 실시는 서문시장 발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이 법이 1679년 뒤늦게 실시되기는 하였지만, 이 법이 실시됨에 따라서 종래 대납지폐(代納之弊)가 격심하였던 공물제(貢物制)·요역제(徭役制)가 원칙적으로 지양되었다.

백성들은 토지 1결에 대해서 쌀 12말 또는 피륙(무명 또는 삼베) 2필만을 수납하게 되었다. 대납지폐 등이 지양됨으로써 납세액이 줄었으므로 일반백성의 소득도 그만큼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해내려고 하는 의욕이 북돋우어졌던 것이다.

④ 일반백성들은 애써 생산한 물자를 이제는 공물로 수납하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고, 그 대가를 갖고 그들이 꼭 필요한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이에 따라서 각 고을에는 크고 작은 향시가 생겼으며, 이러한 향시에는 전문상인인 보부상(褓負商)도 등장하여 희귀하고 값진 물자 중 많은 부분은 멀리 서문시장까지 가져다 매매하므로, 여기서 구입하지 못하는 물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 일제강점기의 서문시장
매월 매순 2일과 7일에 개시(開市)되는 서문시장을 기점으로 하여 18세기 후기에는 가까운 주변에 13개의 중소 향시가 개설되었다.

매 3일과 8일에 열리는 화원장·상시장·매원장·자인장, 매 4일·9일의 대구동문시장(새장)·남창장·하양장, 매 5일과 10일의 하빈장·경산장·해안장, 그리고 매 1일과 6일의 칠곡장·반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구향시권 안의 군소 향시들은 연중 쉴 사이 없이 장이 섰으므로 상품의 공급자·수요자로서의 전문상인과 일반백성들은 얼마쯤 가격원리에 입각한 정상적인 값으로 안심하고 거래할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서문시장은 더욱 번창하였고, 다른 한편 원근의 향시권과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이를테면, 대구·성주·영천·경주·의성·안동 향시권 등이 그것이다.

각 향시권의 심장부인 대구서문시장의 개시일에는 영남지방 사람뿐만 아니라 서울·평양·의주·원주·충주·공주·전주·광주 지방의 대상인이 찾아들어, 서로 원격지 사이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비단 상품만이 아니라 시장 북로일대에 즐비한 여각과 객주집에 투숙하면서 온갖 애환과 정보도 교환하였다.

이처럼 번창하여 명성을 떨치던 서문시장은 1922년에 현재의 위치인 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그것은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대구부에 의해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대구지방의 3·1운동은 흰옷을 입은 서문시장 장꾼들이 주도하였고, 식민주의자들은 흰옷 입은 군중이 시내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현재의 서문시장 터전은 당초에는 ‘성황당못’이라고 불리던 늪지대였다. 저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객토(客土)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내당동·비산동 고지대에 있던 고분군의 봉토를 실어다가 메웠다.

1923년 1년 동안의 총거래액 1만 4,500원(쌀 1말 3원, 지수 100.0)이던 것이 1928년 259만 5,768원(쌀 1말 3원, 지수 1,790.2)에 달하여서, 불과 5년 사이에 구시대의 서문시장의 명성을 되찾았다.

 


■ 광복 후 현황
서문시장은 민족항일기 말기의 통제경제시대를 당하여 온갖 곤욕을 치렀고, 광복 후의 무질서 속에서 여러 차례 뜻하지 않았던 화재가 일어나서 많은 이재민을 내었다.

이어서 또 불행스러운 6·25전쟁을 치렀다. 휴전협정이 성립되자 전쟁 후의 특수경기를 맞게 되었다. 전통적인 섬유도시인 대구 주변의 각종 직물공업을 배경으로 하여 서문시장에는 전국 최대규모의 포목 도매·소매 시장이 형성되었다.

1957년 1일 평균 거래액이 2억 환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대구시의 15개 시장 총거래액의 4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6·25전쟁 후의 특수경기하에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사이에 여건이 격변하였고 1970년대 들어서면서 서문시장은 이전보다 쇠퇴하게 된다. 대구 지역의 섬유공업이 급속한 산업화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해 지위가 하락하면서 서문시장의 도매기능에 영향을 준 것이다. 전국 도로망의 발달로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유통체계가 변화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는 경상북도와 전라도 일부 지역에 값싼 면직물과 화학섬유, 메리야스, 재봉실 등을 도매하고 있다.


■ 화재사고
일제강점기에 지은 낡은 건물과 좁은 통로 등으로 인해 1970년대에만 큰 화재가 23번 발생했다. 대도시 중심 지역에 있고 기존의 터전이 협소해지면서 시장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교통체증이 빈번해진 문제도 있다.

2005년 12월 29일 대형 화재가 발생해 서문시장 2지구 전체가 불에 타 없어졌다. 화재로 사라진 2지구는 재건하여 2012년 9월에 영업을 시작했다. 2016년 11월 30일 새벽 서문시장 4지구에서 대형 화재가 다시 발생했다. 소방인력이 투입된 지 6시간 만에 큰 불길은 잡았으나 소방관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화재로 4지구 상가 전체가 전소하여 830개 이상의 점포가 소실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Daum), 다음백과

 

 

 


 

 

 

 

 

서문시장은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시장으로, 서문시장의 옛 이름은 대구장이다.
대구장은 조선시대에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 중 한 곳이었다.
원래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 잡은 소규모 장이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물자 조달의 필요성이 증대하자 장이 크게 발달하였다.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대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고,
1669년(현종 10)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도로 분리되어 있던 경상도가 통합되어 하나의 행정권을 형성함으로써 대구의 경제적 위치도 크게 부상되었다. 이 때 대구장의 거래량도 급격하게 늘어 북문 밖에서 현재의 동산파출소 자리로 장을 옮겼다. 당시 2일·7일이 장날이었던 도매업 중심의 대구장과 4일·9일에 개장된 대구신장(동문시장)은 도내 각지의 5일장을 연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770년 대구에는 9개의 5일장이 있었으며, 인근 20리에 있었던 칠곡읍내장과 함께 대구읍내장(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완전한 시장망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 대구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서남쪽에 있던 천황당지를 매립하여 다시 장을 옮긴 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 위치이며, 1922년 공설시장 개설 허가를 받았고, 대구읍성 서쪽에 자리하여 서문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서문시장의 대지 면적은 2만 7,062㎡, 건물 총면적은 6만 4,902㎡이다.
1지구·2지구·4지구·5지구·동산상가·건해산물상가 등 6개 지구로 구성되고, 약 4,0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으며 상인 수는 약 2만여 명이다. 주거래 품목은 주단·포목 등 섬유 관련 품목으로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원단 시장이다.
그 밖에 한복·액세서리·이불·의류·그릇·청과·건어물·해산물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된다.

 


대형매장 입점과 유통업 발달로 재래시장이 다소 위축됐으나, 대구시와 시민들의 끊임없는 시장 활성화 노력으로 2016년 6월 상설 야시장이 개설됐다. 저녁 7시경이면 350m의 시장 길에 80여개의 다양한 점포들이 불을 밝혔고, 수많은 방문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아쉽게도 30여개 점포만이 야시장에 참여하고 있으나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 삶의 모습과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통시장으로 젊고 활기찬 시장으로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2005년 12월 29일 화재로 인해 6개 지구 중 가장 큰 2개 지구(지하 1층·지상3층, 건물총면적 1만 9,992㎡ 규모의 상가)가 전소되었으며, 2012년 9월 준공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출처 : 서문시장 홈페이지 : http://seomun.eneeds.gethompy.com/
서문시장 야시장 홈페이지 : http://www.nightseomun.com/html/index.php

 

 

서문시장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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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ightseomun.com

 

 

 

 

 

 

아래 사진은 22. 6. 11(토) 서문시장 야시장의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서문시장의 팜프렛을 스캔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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