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불암에 도착했을때 마침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사중이라 염불암 신도들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하면서 같이 공양을 하자고 한다. 먼저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절에서 제공한 커피마저 맛있게 마시고 있다. 염치불구 하고 보살님께 인사를 드리니 기꺼이 비빔밥과 시원한 챗국을 내어주신다. 점심시간이 가까와지는 11시 30분이라 배도 출출한 상태이고 운동후라 그야말로 꿀맛이다. 지금까지 갓바위 선본사나 약사암 등에서 만났던 공양과는 감히 그 차원이 달랐다. 정말 세상에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고마운 마음으로 순식간에 한그릇을 비우고 경내에 있는 식수대에서 간단히 설거지후 반납하고 바닥난 식수를 보충한뒤에 느긋한 마음으로 칠불암을 살펴 보았다. 칠불암의 공양은 잊지못할 고마움의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을것 같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국보 제31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36 이 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석불'이라 불린다. 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화령 바위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頂)는 높은 곳을 의미하며 남산에는 세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삼화령(三花嶺)은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이 기예를 닦던 장소이자, 미륵사상이 융성했던 곳이다. 선덕여왕시절 생의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위에 안치 해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또한, 이 곳이 미륵의 성지였음을 밝혀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3월 3일에 경덕왕이 신하들과 함께 귀정문의 누각에 나가서 이르기를, 뜻과 예절을 갖춘 승려를 데려 오라고 하였다. 이 때 검소한 옷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불러 영접하였다. 승려가 들고 있는 삼태기 속에는 다구만이 가득하였다.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 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삼화령이 미륵불과 인연이 있는 곳임이 밝혀졌으며, 경주 남산성 부근에서 삼화령과 관련된 석불 3존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 세존이 있었다는 삼화령의 위치와 석불 3존에 대한 존명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이를 추측하는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출처 : Daum 백과
한잔 차에 안민을 노래하고 ~ 이 지역은 서라벌 삼월 삼일 날, 충담스님이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 부처님께 차를 올린 고운 뜻을 받들어 차나무를 심고 가꾸어 이답게 살 수 있는 슬기를 함께 하고자 차나무를 심습니다. 차나무가 크게 꽃 필 수 있도록 마음모아 주세요 경주문화축제위원회 삼화령
ㅇ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頂)는 높은 곳을 의미하며 남산에는 세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선덕여왕시절 생의(生義)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위에 안치 해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경덕왕때 향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忠談)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 구월 구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는데 바로 그 부처님으로 짐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지름 2m의 연화대좌만이 남아 있으며, 진입도로 아랫쪽에 절터가 남아있는데 그 곳이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력은 절터 옆에 서있는 비석에 있으련만 이제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 받침만이 역사의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ㅇ 탐방로 안내도상 현위치는 연하대곡 대연화대이다.
ㅇ 이정목 : 지금까지 온 방향은 통일전주차장 3.5km, 왼쪽은 용장마을 3.0km, 용장사지 0.55km, 진행방향은 포석정주차장 5.0Km, 금오봉 0.7km 방향으로 계속 임도를 따라간다. ㅇ 탐방로 안내판 : 현위치는 용장마을에서 금오봉을 거쳐 삼릉으로 이어지는 4.7km, 3시간 35분 거리의 '용장골 탐방로' 코스이다. ㅇ 용장골 안내판 용장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400m 아래로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용장사터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려래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창한 대현스님이 거주하신 곳이며 조선 세조때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곳이기도 한다. 대현스님이 삼륜대불을 돌면 부처님도 따라 머리를 돌렸다고 하며, 그 뒤쪽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ㅇ 이정목 : 지금까지 온 방향은 고위봉 4.6km, 통일전주차장 4.2km, 용장마을 3.5km, 왼쪽은 약수골입구 1.5km, 약수계곡마애입불상 0.4km, 진행방향은 포석정주차장 4.7km, 삼릉주차장 2.6km 방향으로 직진이다. ㅇ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질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ㅇ 이정목 : 지금까지 온 방향은 삼릉 2.3km, 금오봉 0.2km, 오른쪽은 통일전주차장 4.0km, 용장마을 3.5km, 용장사지, 진행방향은 왼쪽 포석정주차장 4.5km 방향이다. ㅇ 탐방로 안내판에 의하면 현지점은 '약수골 코스'와 '용장골 코스'의 일부이다.
ㅇ 이정목 : 지금까지 온 방향은 통일전주차장 4.3km, 금오봉 0.5km, 직진은 포석정주차장 4.2km, 진행방향은 오른쪽 통일전주차장 2.65km, 지암곡3사지삼층석탑 0.55km, 팔각정터 0.1km 방향이다. ㅇ 탐방로 안내판에 의하면 현지점은 '금오봉코스'의 일부이다.
신라 시대 여기 아랫마을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피리'라는 소녀는 불쌍한 할아버지를 극진히 챙겼다. 세월은 흘러 피리도 처녀가 되어 결혼을 하고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할아버지는 떠난 피리를 생각하며 눈물짓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리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자신이 미워 이 산 나무에 목매어 죽어서 큰 바위가 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뱀이 되어 피리를 칭칭 감고 괴롭혔다. 할아버지는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피리를 괴롭히니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빈다. 피리 소녀도 자기를 그리워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너무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피리는 "인간 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사랑의 인연을 못 풀었으니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할아버지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러자 할아버지 바위 옆에 또 하나의 바위가 우뚝 섰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상사바위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ㅇ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남산일원" 경주는 천년의 역사를 품은 신라의 수도로서 수많은 유적과 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00년 남산을 포함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세계인류문명에 주목할 만한 문화적 업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을 잇는 남북길이 10km, 동서 너비 4km의 타원형으로서 40여개의 계곡을 품고 있다. 신라인의 신앙과 혼이 가득한 불교 관련 유적뿐만 아니라 왕릉, 궁궐터 등 소중한 역사 유산을 간직하고 있어 노천박물관이라 부르는 세계적 명소이다. ㅇ 이정목은 지금까지 온 방향(금오봉)만 가르키고 진행방향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