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이틀전에 강구에 갔다가 오늘은 그 보다 훨씬 가까운 경주 남산을 목표로 방향을 잡았다. 남산의 금오봉을 오르는데는 많은 코스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부담이 작으면서도 문화유산을 탐방할 수 있는 코스를 선정했다.
ㅇ 평소 동네산만 돌아 댕기다가 이따끔 한번씩 이름난 산들을 찾게되면 이름이 날 수 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동네산에 비해 명산은 그만큼 큰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 돌아본 남산 금오봉은 해발 468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임에도 그저 밋밋한 육산이 아니라 탐방로 주변의 돌을 이용해 조성한 돌바닥길과 크고작은 바위와 기암들이 수시로 나타나는 등 근육질 남성형의 산세를 보여주고, 정상에서 용장마을로 내려가는 하산길에는 그보다 더 실감나는 전망바위들과 계곡의 길이가 약 3km되는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용장골의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다. 게다가 산행 내내 군데군데 문화재들이 있어 이를 보는 재미는 다른 산행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특미이다.
■ 탐방일 : 2020. 7. 31(금), 흐리고 가끔 비
■ 탐방코스 : 경주 남산(금오봉) 문화유산탐방로 1구간(삼릉~용장골)
삼릉 - 삼릉계곡 - 바둑바위 - 상선암 - 금오봉 - 용장사지 - 용장마을
■ 탐방거리 : 6.6km * 트랭글 기록
■ 탐방시간 : 3시간 36분
경주 삼릉솔숲은 경주 남산 서쪽에 위치한 소나무 숲으로 삼릉(신라왕릉)이 위치해 있으며 능 주변으로 아름드리 도래솔(삼릉왕송)이 군무하듯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경주 남산은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모두를 이르는 것으로 고대국가 신라의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던 사령지 이면서 초기 궁궐지, 왕릉, 불교조각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본포되어 있는 신라와 경주의 신령스런 공간이다. 그리고 김시습(1435~1493)이 남산 금오산실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소설 금오신화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한 문학적 고향이기도 하다.
경주는 다양한 역사수림을 간직한 역사도시로 사진작가들에게 숲 촬영지로 가장 유명하다. 특히 2005년 소더비 경매에서 삼릉솔숲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팝가수 앨튼 존이 매입한 이후로 삼릉솔숲의 정취를 사진에 담고자 하는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들 사이로 내리는 햇빛은 가히 환상적이며 봄날 소나무 사이로 피는 진달래도 진풍경 중 하나이다. 경주 남산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1985), 세계문화유산(2000)으로 지정되었고, 삼릉솔숲은 형산강 팔경(2016)에 선정되었다.
출처 : 현지 안내판
경주 배동 삼릉은 사적 제219호로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능이 모여있다고 하여 삼릉이라 불린다. 모두 박씨 왕들이다. 중앙에 있는 신덕왕릉은 1963년 도굴을 당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되었고, 벽면은 병풍처럼 색이 칠해져 있었다. 서편의 경명왕릉은 경명왕이 세상을 뜨자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한 후에 다른곳으로 산골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능으로 전하고 있는데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세 고분 모두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규모와 비슷하나 아무런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고, 현재 놓여 있는 3개의 상석도 모두 최근에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다만 고분 내부에서 발견된 벽화는 단순한 채색면에 지나지 않지만 벽화자료가 거의 없는 신라고분에서는 주목되는 자료이다.
경주 남산 일원은 사적 제311호로,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른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관련 유적 이외에도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인 남산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간직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전설.설화들이 남산 곳곳에 깃들어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30미터 옆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겨 놓은것으로 머리와 두 무릎, 수인이 파괴되어 어떤 불상인지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오른쪽 바위 가운데 본존이 앉아있고, 그 좌우에 보살 두분이 서있는데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고 한다. 왼쪽 바위면 가운데는 본존이 서있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암벽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삼릉계곡선각육존불 앞에 있던 지붕틀을 2019년 정비하였는데, 이곳에 다른 탑재가 없는것으로 보아 다른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릉계 삼층석탑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서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인근에서 반출된 것으로 추정해 왔고, 2007년 주변공사에서 발견된 석탑 부재 2점이 석탑 훼손부분과 일치하여 원위치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가면 삼층석탑이 있었던 원래위치를 볼 수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66호,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9세기 전반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의 얼굴이 파손이 심해 2007~2008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정비하였고,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석조여래좌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중 이곳에서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삼층석탑의 조각이 발견되어 원위치로 확인되었다. 3층석탑은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큰 바위 능선을 기단으로 이용하여 작지만 웅장하게 조성되었다.
개인사찰로 보이는 '상선암'은 왠지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고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서 법당 밖에서 시주후에 잠시 소원을 빌고 탐방을 이어갔다.
거대한 바위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남산에서 2번째로 큰 불상이다.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입체감 없는 신체표현, 거칠고 치졸한 옷주름선 등으로 보아 9세기 불상양식을 반영하는 거대한 불상이다.
ㅇ 오늘 본인은 탐방로 안내판중 문화유산탐방로 1구간(삼릉~용장골, 4.0km)을 걷고 있다. 가까운 시일내에 2구간(염불사지~새갓골 4.6km)도 걸어봐야겠다.
ㅇ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 날 두 신이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질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포석정주차장 4.7km, 삼릉주차장 2.6km, 상선암 0.9km, 오른쪽은 약수골입구 1.5km, 약수계곡마애입불상 0.4km, 진행방향은 왼쪽 고위봉 4.6km, 통일전주차장 4.2km, 용장마을 3.5km 방향으로 내려간다.
ㅇ 용장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400m 아래로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용장사터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려래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창한 대현스님이 거주하신 곳이며 조선 세조때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곳이기도 한다. 대현스님이 삼륜대불을 돌면 부처님도 따라 머리를 돌렸다고 하며, 그 뒤쪽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ㅇ 용장사지 삼층석탑 북쪽에 위치하며 디딤돌 4매를 조립하여 받침돌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형 몸돌을 올려 놓았다. 2019년에 훼손방지를 위해 주변을 정리했다고 한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금오봉 0.9km, 진행방향은 용장마을 2.65km, 용장사지 0.2km 방향으로 내려간다.
탑부재에서 몇걸음 내려가면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오늘 탐방과정에서 가장 좋은 느낌이 드는곳이다. 사찰내 마당에 서있는 대부분의 석탑에 비해 홀로 높은곳에 꿋꿋하게 서있는 모습이 좋다.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곳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아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윗부분이 없어져 탑의 높이는 4.42m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이며,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보물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석조여래좌상 우측 후방 암벽에 조각된 것으로 균형잡힌 신체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유적으로 보물 제9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일장 육척인 미륵장륙상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다. 삼륜대좌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이 석불은 독특한 형태의 둥근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 동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제작된 것으로 보물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장사지는 신라 경덕왕때의 고승 대현과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시대에 패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설잠스님(김시습)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서 금오신화를 썻다고 하니 조선중기 까지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절터 축대들과 기와 조각들만이 폐허를 뒹굴고 있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금오봉 1.1km, 진행방향은 용장마을 2.45km 방향으로 내려간다.
용장사지에서 '갑술3월일 용장사'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삼국유사'에는 용장사에 머물던 대현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옛날 용장사에는 돌로 만든 미륵장육상이 있었는데 대현스님이 염불을 외며 그 주위를 돌면 미륵상도 역시 스님쪽으로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ㅇ 설장교는 조선시대 학자이자 승인 김시습의 법호를 따서 이름지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용장사가 있었다고 하여 골짜기를 용장골이라 불러왔다. 용장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초(1465~1470)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산실을 짓고 "유금오록"에 155수의 시를 남겼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곳이며, 또 속세를 떠나 산승으로 있으면서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로 북향화를 심었던 곳이다. 이 유서깊은 용장골에 다리를 놓으매 매월당 김시습을 기려 설잠교라 하였다. 김시습(1435~1493)의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또는 동봉, 법호는 설잠, 관향은 강릉이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금오봉 1.7km, 용장사지 0.6km, 왼쪽은 이영재 0.95km, 고위봉, 진행방향은 오른쪽 용장마을 1.85km 방향으로 내려간다.
ㅇ 탑상골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용장사 탑은 해발 약 400m의 높고 큰 바위산을 하층 기단으로 삼아 건축한 삼층석탑이다. 높이 5m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탑이지만 암반 자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자연과 조형물이 일체가 되어 밑에서 올려다 보면 하늘을 배경으로 부처님 세계에 우뚝 솟은 감격스런 탑이다. 이 탑은 9세기경 신라 말기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ㅇ 탑(탑파)
탑의 기원은 인도어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옮긴 탑파의 줄임말이다. 처음에 탑은 석가모니 열반 후 그 몸에서 나온 8만 4천개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파는 초기불교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것이 탑의 기원이다. 초기의 탑은 마치 사발을 엎어 놓은듯 둥글게 만들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목조 건축물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탑의 재료는 중국에서는 벽돌 탑을 많이 만들었고 일본은 목탑을 주로 만들었다. 우리 나라는 주로 돌을 깎아 탑을 세웠다. 우리 땅에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석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돌로 만든 석탑의 형식은 한국만의 양식이다.
용장골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21세때(1455년) 수양대군(세조)의 단종폐위 소식을 접하고는 통곡한 뒤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수년 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29세 되던 해 찾은곳이 바로 이곳 용장사이다. 7년간은 은적암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은적암에서 잡다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그는 뒤에 충남 부여 무량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다가 59세(1943)의 일기로 별세했다.
김시습은 생전에 155수의 시를 남겼는데 안내판에 소개된 '용장골에서'를 읽어보니 오가는 사람없는 깊은 산골에서 자연과 지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것 같다.
ㅇ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 약사여래는 인간의 4가지 고통(생노병사) 가운데 병을 주관하는 부처이다. 흰손은 약 그릇을 들고 오른손 끝은 무릎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그 의미는 질병의 마귀로부터 항복을 받는 모습을 나타낸 여래상이다. 지금은 머리와 손 부분이 파손된 상태이며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남산에서도 셋 밖에 없는 방형대촤(네모)로 땅 속에 묻혀있다.
ㅇ 지금까지 온 방향은 금오봉 2.2k석조약사여래좌상m, 용장사지 1.1km, 진행방향은 용장마을 1.35km 방향으로 직진이다.
연꽃대좌에 앉아 왼손에 약그릇을 든 약사불 좌상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9년 법당골 절터에서 머리 없는 불상과 대좌, 광배의 일부분이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겨졌다. 1975년 따로 전시되던 머리와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ㅇ 용장이라는 말은 신라시대의 사찰인 용장사가 있던 계곡이라는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남산의 50여개의 많은 골짜기 중 하나인 용장골은 계곡의 길이가 약 3km되는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로 산에서 흐르는 물이 깨끗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골짜기에 현재 22개소의 사지(절터)가 확인되고 있다.
신라 대현스님의 새벽 염불소리에 산 비둘기가 홰를 치고 설잠 김시습의 꿈이 서렸던 곳이 이곳 용장골이다. 현재 22개소나 되는 절터들은 용장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이름이 전해내려 오지 않는다.
ㅇ 경주 남산은 옛 서라벌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산이라 하고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와 50여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골짜기 마다 많은 불교유적이 남아있어 산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자손대대로 소중하게 지켜야 할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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