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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신돌석/화화(火話)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 & 생가지

by 영영(Young Young) 2014. 5. 15.

2014. 5. 14(수)  초여름 날씨

 

경북 도청에 마련된 진해 세월호 사고 분향소를 찾았다가 다시 영덕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가 훌쩍 넘었다.

어디로 갈까?  특별히 예정해 둔 장소도 없고 일단 조기퇴근 신고를 하고 집으로 갔다.

마땅히 갈데가 없어서 업무차 영해를 오가면서도 지나치기만 했던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돌아보고자 영해로 승용차를 몰았다.

사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일전 업무차 영해에 들렀다가 알게된 친구와 차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많은 유적지 가운데에서도 특히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관심이 가는것은 장군이 평산신씨 우리 가문이기도 하다.

유적지와 생가를 둘러보고 얼마전에 알게된 친구한테 전화를 하니 다른 동네로 이사 갔단다.

오호 통제라...영해 센터장과 3명이서 차한잔 할려고 생각했더만 ~~

센터에 들러서 센터장과 둘이서 차한잔 하고 오후 6시에 맞추어 영덕으로 다시 되돌아와 막 퇴근하는 동료와 같이 부대찌개로 저녁을 먹는것으로 마무리,,,,

오랫만에 별미로 먹어본 부대찌개, 에이~~ 아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는 영덕읍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진 방향으로 가다가 영해면 소재지에 닿기전 축산면(丑山面) 도곡리 7번 국도변에 위치한다. 이 고장 출신인 의병장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우국충정을 기념하고 항일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1999년 11월 18일 개관하였다. 부지 약 1만 6000㎡ 규모에 사당인 충의사를 비롯해 동재·서재·외삼문·내삼문·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다.

 

▲ 유적지 입구 이정표

이곳 유적지와 1.6Km 떨어진 곳에 신돌석 생가지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먼저 보이는것이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건물이 기념관이다.

 

▲ 안내판의 좌후방에는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건물이 있다.

 

▲ 안내판

신돌석 장군에 대한 일대기와 유적지 조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곳 신돌석 장군 유적지[ 申乭石 將軍 遺跡地]는 영덕군과 국가보훈처에서 장군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탄생지인 이곳을 성영화 하기로 결정하고 1996년 12월부터 1999년 11월까지 사당1동, 동재와 서재 각1동, 기념관 1동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돌석 의병장은 1878년(고종 15)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부친 신석주와 모친 분성 김씨 사이의 2남2녀중의 세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 신씨이며 자는 순경(舜卿)이다. 본명은 태호(泰浩)이고 돌석(乭石)은 그의 이명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살해 사건과 단발령(斷髮令)으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1896년 신돌석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에는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늑)약’(乙巳條約 / 乙巳勒約 양국의 평등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임을 뜻함)을 체결하자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도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애국적 의분을 대일항쟁으로 쏟았다. 

 

처음에는 의병 100명을 모아 영릉의병장(寧陵義兵長)의 이름으로 출발하였다(1906).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서 일본군선 9척을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에서 일본군들을 습격하였다. 이어서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그들이 전선을 가설하는 작업을 공격하여 방해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울진 수동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증모하였고, 그 병력으로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을 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가까운 청부역으로 진군시켰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의병을 자청하여 약 3,000여 명이 증가하였다. 일본군이 강력한 의병 소식에 영양의 주곡(注谷)으로 퇴각하자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대일 전투를 벌였고, 청하로부터 조현(鳥峴)에 이르러서도 적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소항을 지나 대동(大洞)으로 진출하였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였다. 

 

전국의 의병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양주(陽州)에 집결하였다

(1907. 12).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양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 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 전국 의병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로 돌아와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1908. 1). 1908년 3월에는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결합하여 의병세력을 강화하고, 춘양, 황지, 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도 평해 한곡에서(7월), 희암(9월)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0월까지 진지를 이동하면서 활약한 후, 겨울이 되어 다음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귀가시키고 눌곡(訥谷)에 있는 부하 의병인 김상열(金相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형제들이 모의하여 그만 신돌석을 타살하고 말았다(1908).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의병은 보통 사회적 지도 계급인 유생 양반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평민이 의병을 지휘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돌석은 지도력이 훌륭하고 농민들과의 대화가 잘되었으며 민폐를 끼치지 않아 여러 곳에서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또한 전술이 뛰어나 일본군을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여 피해를 많이 주어 전과를 많이 올렸다

. 그리하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서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는 큰 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신분차별 의식 때문에 의병의 연합전선 형성 과정에서 화합하지 못한 것은 국난의 역사 속에서도 개방적이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겼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유적지 파노라마(클릭하면 확대될걸~!!)

 

▲ 안내판의 오른쪽 뒤에 위치한 기념관으로 먼저 가 보았다.

 

 

기념관에는 일제의 침략 만행과 의병활동, 영덕군 지역의 항일운동, 일본군의 무기와 형장구 및 신돌석의 약력과 설화, 신돌석의 태백산전투, 그림으로 보는 신돌석의 일생, 신돌석의 전략과 전술, 신돌석 진의 조직도 등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장도, 화승총, 창검류, 처결문서 등 유물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 기념관 바로 옆 쉼터

 

신돌석 장군 기념관 입구 정면의 흉상, 흉상 앞에는 방명록이 놓여있다. 

 

 

 

 

 

 

 

 

 

 

 

▲  기념관에서 충의사로 이어지는 계단

 

▲ 의병대장신공유허비

신돌석의 아우인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194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번지(복두산 기슭)에 건립한 것을 1999년 11월 18일 이곳 유적지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 순국의사 신돌석장군 기념비

 경상북도 독립유공자선열유족회 의병대장 신돌석장군기념사업회에서 1965년 7월에 영덕군 영덕읍 우곡리(호호대, 솔동산)에 건립한것을 1999년 11월 18일 이곳 유적지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 외삼문

유허비와 기념비를 지나면 외삼문이 있다.

 

▲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는 서재, 오늘쪽에는 동재가 위치한다.

 

▲  외삼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위치한 동재

 

▲ 서재

 

▲ 동재

 

▲ 내삼문

동재와 서재 후방에 내삼문이 있다.

 

▲ 내삼문을 들어서면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가 있다.

 

▲ 내삼문을 들어서서 충의사 앞의 정원

 

▲ 충의사 정원에서 내려다본 동재와 서재, 그리고 외삼문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충의사의 내부

신돌석 장군은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0㎝ 정도에다 거무튀튀하면서도 크고 넓은 얼굴, 넓은 턱을 가졌고 천연두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장군의 영정은 친척 가운데 많이 닮았다는 인물을 모델로 제작했다고 한다.

 

▲ 충의사 정원에서 내삼문, 동재, 서재, 외삼문 방향

 

▲ 충의사

 

▲ 충의사 정원에서 유적지 입구방향으로 본 모습

 

▲ 충의사에서 기념관으로 이어진 인도

 

 

▲ 충의사에서 유적지 입구 방향으로 내려오면 비문을 만나게 된다.

 

▲ 돌 축대 뒤로는 유적지 관리사 건물이 위치한다.

 

▲ 비석의 뒷면

 

▲ 장군의 공훈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장군이 1904년 27세가 되던 해 울진 평해 월송정에 올라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애국충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읊은 시가 적혀 있다.

 

登樓遊子却行路(등루유자각행로) / 누에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可歎檀墟落木橫(가탄단허락목횡) / 단군의 옛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男子二七成何事(남자이칠성하사) / 남아 스물일곱 이룬것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槪性(잠의추풍감개성) /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 비석 옆에는 한시를 설명한 안내문이 서있다.

 

▲ 충담사의 아래에 자리잡은 관리사 건물

 

 

 

▲ 관리사 인근에 핀 여름을 알리는 이팝나무

 

 

 

 

신돌석 장군 유적지 입구 바로 옆에 자그만 소공원이 있다.

 

 

▲ 유적지에서 내려 본 소공원의 모습

 

▲ 공원은 벤취와 자그만 광장이 있다.

 

▲ 공원 산책로

 

▲ 공원 인도블럭이 깨끗한것으로 보아 조성한지 그리 오래 된것 같지는 않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와 소공원을 둘러 보고는 약 1.6Km떨어진곳에 위치한 생가를 찾았다.

장군 생가는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부친 신석주(申錫柱)가 1850년경에 초가(草家)로 지은 가옥이었으나, 1940년경에 일제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하여 생가에 불을 질러 일부가 소실되었다. 1942년에 다시 보수하였으며, 그 후 1995년에 유적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방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생가 주차장

 

▲ 생가는 2동이다.

 

▲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 동은 마루와 방으로 되어있고 별도의 부엌이 없다.

 

▲ 정면에서 보아 왼쪽 동은 마루, 방, 부엌을 갖추고 있다. 소위 살림집이란 뜻, 한창 보수중이다.

 

 

 

▲ 생가 앞에 설치된 안내문

문화재 건물이나 고적지를 돌아보게되면 늘 궁금한 것이 어느 부분이 당시의 옛모습을 자연 그대로 간직한 것일까 하는것,

거의 모든 문화재들이 수없는 복원 과정을 거쳐 왔기에 과연 옛 모습 그대로의 정취와 역사의 모습을 느끼기에는 한참 거리가 멀기만 하다. 차라리 고치고 또 고친 유명한 문화재 보다 오히려 오래된 노송 한그루에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신돌석 장군의 생가가 위치한 노곡리 마을회관으로 마을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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