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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신돌석/화화(火話)

영덕 화수루 & 갈천동 초가

by 영영(Young Young) 2014. 3. 25.

2014. 3. 25(화) 포근

 

대부분의 목조 문화재 건축물이 산림과 인접하거나 외진곳에 위치하고 있어 산불 발생시 소중한 문화재 소실의 우려가 있다. 

문화재란 한번 소실되면 재생할 수 없는 귀중한 유산이기에 사전에 그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한 셈이다.

화재예방 활동차 오늘 영덕의 북쪽 동네에 자리한 창수면 갈천리에 위치한 화수루를 찾았다.

관리자가 문화재 건축물의 인근에 거주하는것도 아니고 더구나 화수루 건물의 입구가 시건이 안되어 누구든지 쉽게 내부로 들어가서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염려스러운 상황이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가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것이 안따깝기도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문화재 관리의 한계를 보여주는것이 아닌가 하는것을 느꼈다.

 

 

 

화수루(花樹樓)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외숙부인 권자신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화를 당하고 그 아들 권책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숙종(재위 1674∼1720) 때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이 지어졌는데,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화수루와 청간정만 남았다. 화수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의 누마루 집으로 양쪽 1칸씩은 방으로 꾸몄고 가운데 3칸만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소박한 꾸밈새로 고건축물의 중후함이 엿보인다. 현재 주위는 민가와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뒤쪽 낮은 언덕에 오래된 무덤 1기가 있는데 이 누각에 딸린 것으로 보인다.

 

화수루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안동권씨 문중의 재사 건축물이다.

1676년 창건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19년(1693)에 다시 지었다 한다.

 

 

 

 

 

 

 

갈천동초가(葛川洞草家 경상북도민속자료 제2호)

 

집의 가운데에 마루를 두는 영동형 양통집으로,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양통집은 한 채를 2줄로 만든 겹집이며, 주로 태백산맥의 동쪽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는 방이 한 줄로 배열되는 태백산맥 서쪽의 외통집과 대조를 이루는 형태이다. 앞면 3칸 반·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초가이며 까치구멍을 내었다. 까치구멍은 부엌 위로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붕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주로 양통집에만 나타난다. 부엌에는 외양간을 들였으며, 부뚜막 사이 좁은 벽에는 조명과 난방을 겸한 코쿨이 남아있다.

산간지방의 추위에 대비한 까치구멍집으로 폐쇠적인 구조로 집안에 모든 기능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