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30(수)
황경림나무와 동호서당에 이어서 ~~~~~
대구 혁신도시에는 12개의 공공기관과 의료관련 시설, 아파트, 수많은 상가와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혁신도시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 야산과 구릉지대인 신서/각산동에 메머드급 공공기관과 대형상가가 들어선 것을 보고 입을 쩍 벌리는 사람도 있지만 혁신도시내에 조성된 각종 편의시설과 크고 작은 공원을 알고나면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그 중에서도 당연 특색있는 공원이 동호유적공원이라고 볼 수 있다.
유적공원은 그다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구 신서혁신도시 택지개발지구내에서 발굴조사한 문화유적중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를 원형 그대로 이전.전시함으로 지역민들이나 방문객 들에게 이 지역 선대의 문화와 삶의 가치를 심어주는데 그 의미를 담고 있다.
공공기관이나 아파트 주위에 조성된 대.소공원들이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반면 동호유적공원은 혁신도시내에서도 북쪽으로 기존 주거지역과는 거리가 먼 후미진곳에 자리잡고 있어 아직까지 지역민조차 그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공원내 동호서당과 유구전시장을 돌아보고 반경 300여미터의 동곡지 에코로드와 황경림 나무를 묶어서 원형으로 한바꾸 돌면 가족들에게는 운동과 휠링, 아이들에게는 교육효과 까지, 연인들에게는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동호유적공원을 찾아가는 방법은 대구 동내동의 "동곡지"를 검색해서 가다가 동곡지 진입 전에 우회전 하거나 한국가스공사 기숙사를 지나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400여미쯤 올라가면 된다.
앞에서 동호유적공원내 동호서당을 돌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유구전시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유구전시장으로 가는길은 동호서당을 돌아보고 유구전시장과 연결된 목교를 통하여 접근하는 방법과 곧바로 유구전시장으로 직행하는 방법이 있다.
탐방객이 편리한데로 선택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동호서당을 거쳐서 유구전시장을 돌아보지만 경우에 따라 인근에 있는 동곡지나 황경림 나무를 먼저보고 유구전시장에 갔다가 마지막으로 동호서당을 돌아 볼 수도 있다.
먼저 동호서당을 돌아보고 유구전시장으로 가는 코스를 살펴보자
▲ 동내수로6교
유적공원의 입구가 되는 동내수로6교의 모습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왼쪽이 한국가스공사 기숙사, 오른쪽이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연구동 건물이다.
▲ 유적공원 입구
도로 맞은편에서 보면 입구에 안내 간판이 서있고 동내수로6교 오른쪽 뒤로 둥근 지붕 모습을 한 유구전시장 건물이 보인다.
▲ 입구 안내판
동호유적공원은 크게 동호서당과 전통마당, 유구전시장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유적공원의 위치가 혁신도시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내판 앞을 지나면 좌측에 "전통마당" 뒷쪽 정면에 "동호서당"이 보인다.
▲ 전통마당
전통마당에는 파고라 3동과 벤취등이 놓여있어 관람후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전통마당의 좌 우에는 소나무를 심어 공원의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 전통마당을 지나면 정면에 혁신도시 조성과 동시에 이 동네에서 이축한 "동호서당"이 있다. 동호서당은 앞서서 살펴 보았다.
▲ 전통마당에서 유적공원 입구방향의 모습이다.
▲ 전통마당에서 "유구전시장" 방향의 모습이다. 동호서당과 유구전시장을 목교로 연결하고 있다.
▲ 동호서당 담장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서당방향이고 유구전시장은 오른쪽 방향이다.
▲ 동호서당과 유구전시장을 연결하는 목교 아래에도 자그만 마당이 있고 벤취가 놓여있다. 계단위로 올라서면 유구전시장을 만나게 된다.
▲ 목교를 따라 유구전시장 방향으로 올라와서 내려보면 서당건물 주변이 수로와 주변 나무등과 어울려 단정하고 운취있게 보인다.
▲ 유구전시장에서 내려보면 유적공원 입구와 전통마당, 동호서당 목교 등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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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
동호서당을 돌아보고 유구전시장으로 가거나 또는 반대로 유구전시장에서 동호서당으로 돌아보는것이 일반적이지만 유구전시장이 개방형이라 사방 어느쪽에서도 곧바로 접근이 가능하다. 다음은 동호서당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유구전시장으로 접근하는 코스를 살펴보자.
▲ 유구전시장 동편 입구의 모습이다.
▲ 입구 좌측에는 안내판 두개가 서있고 ~
▲ 대구 신서혁신도시 선사유적공원에 대한 소개와 유구발굴위치 및 유적공원조성위치, 유구배치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유구전시장에는 지석묘 7기, 석관묘6기, 수레바퀴흔1개소 등을 배치하고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선사유적공원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구 신서혁신도시 선사유적공원
본 유적공원은 대구 신서혁신도시 택지개발지구내에서 발굴조사한 문화유적중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를 원형 그대로 이전.전시함으로써 이를 영구히 보존하면서 시민들에게 당시의 매장의례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조성한 곳이다.
이곳 대구신서혁신도시지구는 팔공산괴에서 남쪽(금호강)으로 뻗어 내리는 많은 구릉들의 끝단이자 곡부에 의해 형성된 선상지형 충적평야지 지대에 자리를 잡아 입지적 환경이 매우 좋은 곳이다. 이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삶의 흔적들이 남아서 조사되었음이 증명한다.
이와 같이 전체 신서혁신도시지구(4,390,000제곱미터)내에는 2006년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의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유적의 분포범위가 넓게 확인되어 서쪽인 상매.각산동에 해당하는 A구역(635,359제곱미터)은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서, 동쪽인 신서.사복.숙천등에 해당하는 B구역(640,108제곱미터)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2008~2010년에 걸쳐 시굴조사 및 발굴조사를 나누어 진행하였다.
조사결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분묘, 원삼국시대의 분묘, 삼국~통일신라 시대의 분묘, 주거지, 건물지(우물), 도로유구, 고려~조선시대의 분묘, 건물지(우물), 기와가마, 삼가마 등 오랜시간에 걸쳐 삶과 죽음의 공간으로 영속되어 왔음이 밝혀졌다.
특히 본 유적공원에 중점적으로 전시된 B-1구역의 청동기시대 지석묘 및 석관묘 10기(1~4호 지석묘, 5, 8, 18, 21, 25, 35호 석관묘)는 당시 주거영역과 확연히 구분된 무덤영역에 있었던 것으로, 남북길이 25m, 동서길이 25m 범위의 일정한 공간내에 밀집하여 조영된 52기의 지석묘 및 석관묘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외에 같은 시기에 해당하는 B구역의 지석묘 상석 2기와 A구역의 상석 1기를 이전하여 전시하였으며, 또한 삼국~통일신라대의 잘 남아있는 수레바퀴흔 일부도 그대로 떠서 옮겨 놓았다.
▲ 입구에서 전시장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황토시멘트를 깔아 놓았다.
▲ 유구전시장
유구전시장은 배교적 아담한 규모로 돔형 지붕에 개방식 구조로 축조되어 있다.
남쪽과 북쪽이 출입을 위해 트여있고 동쪽과 서쪽에 반달식 축대를 쌓아 전시물을 게시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석관묘를 이장,재현해 놓았고 전시장 주위에는 산책로를 조성하고 산책로와 입구 등 주위에 7기의 지석묘를 배치하였다.
▲ 유구전시장에서 입구로 돌아 본 모습이다.
▲ 전시장 입구 좌측에 있는 지석묘의 모습인데 올 2월달에 찍은 사진에는 지석묘 앞에 꽃이 보인다.
▲ 그런데 10개월 정도 지난 지금은 지석묘 앞에 꽃을 누가 다 캐 버리고 없다. 이 지석묘는 하단의 석관묘와 같이 존재했다고 한다.
▲ 전시장 입구 우측에 있는 지석묘의 모습으로 올 2월달에 찍은 사진이다.
▲ 지금 찍은 사진에도 꽃은 그대로 있다. 여긴 훔쳐가지 않았네..
▲ 올 2월 4일 찍은 사진에는 전시장 곳곳에 잔설이 남아있고, 전시장 바닥 석관묘는 보수중인지 푸른 천막으로 가리고 있다.
▲ 현재 유구전시장의 외부 전경이다.
▲ 전시장의 북서쪽(동곡지 방향)에서 본 모습이다. 전시장 주변에 지석묘 등이 있고 주변은 소나무 수목을 조성해 놓았다.
▲ 전시장의 남쪽과 북쪽은 출입을 위해 개방되어 있는데 북쪽에는 마을 표지석을 옮겨 놓았다.
▲ 전시장의 동편에는 전시장으로 접근하는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 전시장 내부에서 북쪽으로 서있는 각산동 마을 표지석의 모습이다.
▲ 유구전시장의 북쪽 방향에 서있는 각산동 마을 표지석
▲ 서쪽에서 본 마을표지석과 전시장의 모습
▲ 각산동 마을표지석의 정면 모습
▲ 각산동 마을바위(지석묘)
각산동 마을바위(지석묘)는 경작지 내에 세워져 각산동 마을 표지석으로 사용되던 바위로 1990년과 2006년에 지표조사로 확인되었으며, "각산동"이라는 글자가 종방향으로 음각되어 있다.
원래 표지석은 각산동 470-2번지 양계장내에 있었던 8기의 지석묘 상석 중 하나이며, 2006년 지표조사 당시 양계장과 나머지 지석묘는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 각산동 입석
이 바위는 대구혁신도시로 편입된 각산동 마을 입구에 마을 표지석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각산동 주민들은 이 바위를 "마을바위"라 부르며 보호해 왔다.
이 바위는 청동기 시대 거석문화의 한 종류인 선돌(입석)로 알려져 있으며, 표지석으로 쓰이기 전에는 바위 표면의 동전 크기의 홈구멍(성혈)을 보았을때 고인돌의 덮개돌(상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수레바퀴 흔
유구전시장의 북서쪽에는 삼국~통일신라대의 잘 남아있는 수레바퀴흔 일부도 그대로 떠서 옮겨 놓았다. 유리지붕을 하고 있는 곳에 수레흔을 전시하고 있다.
▲ 수레바퀴흔은 옥외 유리전시장에 전시하고 있다.
▲ 사진은 유구전시장의 서쪽 외부의 모습이다. 동.서 양쪽 반달형 축대를 쌓아서 내부에 전시물을 게시하고 있다.
▲ 전시장의 서편 모습으로 전시장 주위에 산책로를 만들고 주변에 고인돌을 조성하였다.
▲ 신서혁신도시를 조성하면서 발굴된 고인돌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고인돌마다 발굴된 위치와 축조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유구전시장의 서편에서 내려다본 동호서당과 전통마당의 전경이다.
▲ 유구전시장 주위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그 주위로 고인돌이 전시되어 있다.
▲ 동편 유구전시장 주변에 전시된 고인돌
▲ 북서쪽에 전시된 고인돌
▲ 서쪽에 전시된 고인돌
▲ 유구전시장과 동호서당을 가로질러 조그만 하천이 흘러가고 있다. 물이 흐르면 좀 더 운취가 있을텐데 ~
▲ 북편에서 본 동호서당의 모습
▲ 동편에서 본 동호서당과 유구전시장의 모습이다.
▲ 남쪽에서 본 유구전시장의 좌측 모습이다. 반달형 축대앞에 전시물이 게시되어 있다.
▲ 남쪽에서 본 유구전시장의 우측 모습이다.
▲ 동쪽에서 서쪽으로 본 유구전시장 내부의 모습이다.
▲ 서쪽에서 동쪽으로 본 유구전시장 내부의 모습이다.
▲ 전시장 내부 서편 모습이다.
▲ 전시장 내부 동편 모습이다.
▲ 전시장 내부 동편 모습이다.
▲ 전시장 내부 서편 모습이다.
▲ 남쪽(동호서당 방면)에서 봐서 좌측 축대에 있는 게시물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살펴본다.
▲ "대구 신서혁신도시 청동기 야외유적공원" 이라고 씌어진 글자 밑의 화살표 방향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 첫번째 만나는것이 "세계의 거석문화"에 대한 설명이다.
▲ 거석문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연석 혹은 가공한 돌을 이용해 구조물을 축조하여 숭배의 대상물이나 무덤을 만든 문화를 말한다. 이러한 거석문화는 유럽,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지역 등 거의 전세계적으로 분포한다. 고인돌, 선돌(입석), 열석(판석), 석상 등이 대표적인 거석문화들이다.
고인돌은 땅위나 땅속에 무덤방을 만든 후 그 위에 큰 돌로 덮개돌을 덮은 무덤의 일종으로 거석문화를 대표한다. 선돌은 큰 돌을 수직으로 세워 놓은 형태로, 마을의 입구에 세워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기념물로 이해되고 있다.
열석은 선돌이 여러 개 줄을 지어 세워진 모양인데 보통 유럽에서 많이 보인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국의 스톤헨지도 선돌을 둥글게 세워 만든 기념물로 열석으로 불 수 있다. 석상은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같이 사람의 얼굴 등 형상을 돌로 새겨 세워놓은것인데 남태평양에 있는 이스터섬의 석상"모아이"가 유명하다.
하단에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이스터섬의 석상 모아이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 그 오른편에는 모아이석상과 스톤헨지의 그림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 다음은 "한국의 거석문화"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거석문하를 대표하는 것은 고인돌과 선돌이 있다. 이 두 거석문화는 모두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인돌의 경우 청동기시대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선돌의 경우 역사시대로 오면서 풍요, 미신,안녕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세워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구 진천동에서는 청동기시대 제단 가운데에 세워져 제의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져 청동기시대부터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거석문화는 청동기시대 사회문화 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청동기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본격적으로 밭농사와 논농사가 시작되면서 생산력이 증가되는 시기이다. 이와 함께 공동체 내에서는 힘을 가진 권력자가 등장해 계층이 발생한다. 즉 농겨에 따른 풍요에 대한 염원과 권력자의 발생이 고인돌과 선돌과 같은 거석문화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하단에는 고창 지석묘, 대구 지천동 선돌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오른쪽 면에는 강화도 고인돌과 구례 구산리 선돌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 다음면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고인돌"에 대한 설명과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UN산하 기관인 유네스코(UNESCO)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가지실현을 위해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현재까지 종묘와 조선 왕릉을 비롯하여 모두 11건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고장,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도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고인돌은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등과 같이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 전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동북아시아 지역 특히 우리나라에는 약 4만여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문화, 사회구조, 정치체계, 정신세계 등을 엿볼 수 있어 선사시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특히 청동기시대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정착생활을 시작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사회에서 지석묘는 조상을 숭배하는 기념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모양과 축조방법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탁자식 고인돌 : 4매의 납작한 돌을 상자모양으로 매장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 편평한 덮개돌을 덮은것으로 북한지방과 강화도에 주로 분포한다.
*기반식 고인돌 : 땅을 판 후 돌을 이용해 매장시설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후 지면에 몇개의 고임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형태이다. 바둑판과 닮았다고 해서 바둑판식 고인돌로도 불린다.
*개석식 고인돌 : 기반식 고인돌과 비슷하지만 고임돌이 없이 매장시설 위에 바로 덮개돌을 덮은 형식이다.
하단에는 기반식 고인돌 & 탁자식 고인돌 & 개석식 고인돌의 모습을 보여준다.
▲ 다음면은 우리나라 지도위에 "한국의 고인돌 분포도"를 표시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고인돌 분포지역이 어느정도 고르게 나타나는중에 유달리 전남지역에 고인돌이 많은것을 알 수 있다.
▲ 다음 순서로는 한국의 고인돌 분포지역과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 고인돌의 특징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밀집과 군집성을 이루고 있는 점 이외에 다양한 외형적 형태의 존재, 거대한 규모를 가진 다양한 무덤방의 형태, 부장품으로 간돌검의 부장 등을 들 수 있다.
▲ 다음은 그림을 통하여 "고인돌 각 부분 명칭"을 설명하고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상부의 덜개돌과 중앙의 무덤방, 하단의 굄돌로 구성되어 있고,
바둑판식(기반식)고인돌은 상부의 덮개돌과 그 아래 굄돌, 돌무지, 뚜껑돌, 무덤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식 고인돌은 상단의 덮개돌, 그 아래로 돌무지, 무덤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면에는 포항 인비리 고인돌 바위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 다음면에는 "간들검"에 대한 설명을 붙이고 있다.
돌을 갈아서 만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로 찌르거나 베는데 사용하였다. 검몸과 자루가 한몸으로 되어있는것이 일반적이지만 슴베에 자루를 끼워서 사용하는것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경북도 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의 중요한 문화요소로 꼽히고 있다.
▲ 다음면에는 여수 오림동 고인돌 바위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 다음은 남쪽(동호서당 방면)에서 봐서 우측 축대에 있는 게시물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살펴본다.
▲ "대구 신서혁신도시 청동기 야회유적공원" 표기옆의 화살표를 따라 움직이면 "대구의 고인돌(지석묘) 문화"가 가장 먼저 보인다.
▲ 대구의 고인돌 문화
대구 분지에도 수많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고인돌이 사라졌다. 주로 신천을 따라 가창, 상동, 이천동, 대봉동, 칠성동과 진천천 주변의 진천동, 송현동, 상인동 또 금호강 북쪽의 칠곡 동명일대 등 대구 분지 전역에서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고인돌은 보통 작게는 10기 내외, 많게는 40여기 이상 무리를 이루며 분포하는 특징이 있으며, 대구 고인돌의 경우 북방식인 탁자식 고인돌은 없으며, 모두 기반식과 개석식 고인돌만 존재한다.
대구의 고인돌에서는 돌화살촉, 간돌검,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에서는 생활도구인 돌토끼, 돌낫, 땅을 파는 도구, 갈판, 다양한 크기의 민무늬토기 등 그들의 생활모습을 엿볼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대구의 청동기 시대는 농경과 수렵, 어로, 채집을 혼합하면서 농경의 비중이 점차 높아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단에는 시지동 지석묘 & 상동 지석묘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 다음면에는 대봉동 고인돌(일제강점기) & 대봉동 돌널무덤(일제강점기)의 모습과 "신서동에서 발굴된 고인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신서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을 포함하여 무덤 88기가 발굴조사 되었다.
하지만 88기 모두 우리가 흔히 고인돌(지석묘)이라 부르는 상석을 가진것은 아니다. 상석이 확인된것은 8기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지상에 아무런 시설없이 지하에 돌을짜서 만든 돌널무덤(석관묘)만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무덤에 고인돌의 상석이 놓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석이 남아있는 고인돌의 경우 고임돌을 놓고 상석을 올려놓은 기반식 고인돌과 고임돌 없이 상석을 올린 개석식 고인돌 등 2종류로 나뉜다.
주검을 안장하기 위해 땅을 파서 만드는 돌널무덤은 만드는 석재의 종류에 따라 활석형, 판석형, 한석과 판석 혼합형으로 나뉜다. 할석형은 땅을 사각형으로 판 후 둥글둥글하게 깬 돌을 이용해 돌담을 쌓듯이 네 벽면을 쌓아올려 만든 것이며, 판석형은 흔히 청석으로 불리는 널빤지 모양의 납작한 돌을 세우거나 눕혀 돌널을 만든 것이다. 혼합형은 할석과 판석을 혼합하여 축조한 것을 말한다. 한편 돌널의 바닥은 판석을 깐것이 대부분이며, 자갈돌을 깐 경우도 있다.
지석묘가 집단을 이루며 모여 있어서 나름대로 묘역을 가지고 있으며, 집단의 사회조직 일면을 보여준다. 지석묘군의 입지는 하천의 자연제방, 평지, 구릉말단부 등 다양하여 집단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영역의 중심 등 여러 모습과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데 신서동 지석묘군은 선상지형 충적평야지대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단에는 B-1구역 1호 지석묘 & B-1구역 1호 지석묘 돌널과 B-1구역 2호 지석묘 & B-1구역 2호 지석묘 돌널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 다음은 신서동 청동기시대 묘역(항공사진)과 신서동 청동기시대 무덤 분포도와 "신서동 고인돌 출토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신서동유적에서 청동기시대 무덤에서는 돌화살촉, 간돌검, 거물추, 간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돌화살촉은 대부분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돌화살촉은 화살대에 끼우는 방법에 따라 슴베가 있는것과 슴베가 없는것으로 나뉘는데 신서동유적에서는 대부분 슴베가 있는 유경식이다. 붉은간토기는 토기를 성형한 후 표면에 산화철의 액체를 바르고 문질러 소성한 토기로 표면이 붉은색 광택을 띈다. 이 붉은 간토기도 집자리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무덤의 껴묻거리(부장품)로만 출토되는 예가 많아 의례용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의 형식을 통해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대략 알 수 있느느데, 신서동유적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주로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하단에는 B-1구역 25호 고인돌 출토 붉은간토기, B-1구역 25호 고인돌 출토 돌화살촉, B-1구역 19호(좌) , 24호(우) 고인돌 출토 돌칼 등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다음은 붉은간토기(경남 산청출토)의 모습 및 돌화살촉의 모습과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어떤 집에 살았을까"를 설명하고 있다.
신서동유적 고인돌 주변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자리도 66동이나 발굴되었다.
기둥과 벽체, 지붕은 모두 없어지고 바닥만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확실한 집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워 억새나 짚과 같은 것을 이용해 지붕을 만든 움집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터의 형태는 대부분 사각형이며 둥근것은 2동에 불과하다. 집의 면적은 대부분이 20제곱미터 미만의 소형이며, 20~40제곱미터 사이의 중형과 40제곱미터 이상의 대형은 비교적 적다. 집안에 난방과 취사를 위해 화덕을 설치했던 것도 확인되며, 일부 집에서는 땅속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위해 바닥에 불을 지펴 단단하게 다진것도 있다.
집터에서는 여러종류의 돌도끼, 돌칼, 괭이, 보습 등 주로 농사와 관련된 유물이 집중해서 출토되었으며, 방추차와 어망추도 소량 출토되었다. 이것은 시니서동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수렵과 채집, 어로생활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단에는 B-1구역 7호 주거지, B-1구역 7호 주거지 출토 토기와 B-1구역 7호 주거지 출토 반달돌칼, 복원한 청동기시대 집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 다음면에는 민무늬토기(무문토기)와 반달돌칼의 모습과 "고인돌(지석묘)"에 대한 설명을 보여주고 있다.
고인돌은 크게 나눠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름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 다음면은 붉은간토기의 모습과 이에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붉은간토기(홍도)는 아주 고운 점토를 사용하여 토기의 형태를 만든 후 표면에 산화철의 액체를 바르고 매끄러운 도구로 문질러 구운 토기이다. 표면에 바른 산화철이 높은 온도에 의해 붉은색으로 발색되며, 토기의 표면을 세밀하게 갈면 광택을 띄게 된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토기와는 흙의 성분, 표면 처리방법 등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 토기는 주로 주거지에서는 출토예가 드물고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어 의례용토기로 인식되고 있다.
다음면에는 달성 평촌리 석관묘3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다음면에는 "요령식 동검"에 대한 설명과 진천동 입석 바위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요령식 동검은 몸체가 중국 악기 비파를 닮아 "비파형 동검"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이라는 점에서 "고조선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 유구전시장의 바닥에는 크게 두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각 3기의 석관묘, 즉 6기의 석관묘를 이장,재현해 놓았다. 석관묘는 우리말로 '돌널무덤'이라고 부르며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며 말 그대로 네 벽을 돌로 쌓은 무덤이라고 할수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본 전시장 바닥 모양이다.
▲ B-1구역 8호 석관묘
발굴시에 돌화살촉 1점이 같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석관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방향은 남-북향이다.
축조방법은 길이 234cm, 너비 107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면에 청석판석 2매를 깔아 주검을 안치할 시상을 마련하였다.
네 벽도 청석판석으로 시상석에 걸쳐서 층층이 쌓아올려 4~5단 정도 남아있다.
석관의 벽은 서장벽-북단벽-동장벽-남단벽 순으로 축조되었으며, 석관의 규모는 길이 117cm, 너비 35cm, 높이 32cm정도이다. 유물은 내부 조사중에 돌화살족 1점이 출토되었다.
▲ B-1구역 5호 석관묘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석관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방향은 북동-남서향이다.
축조방법은 길이 153cm, 너비 109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면에 청석판석 3매를 깔아 주검을 안치할 시상을 마련하고, 네 벽도 청석판석으로 시상석에 걸쳐서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3단 정도 남아있다.
석관의 벽은 서장벽-북단벽-동장벽-남단벽 순으로 축조되었으며, 석관의 규모는 길이 69cm, 너비 25cm, 높이 20cm정도에 불과하여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B-1구역 18호 석관묘
이곳 무덤에서도 돌화살촉 1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석관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방향은 동-서향이다.
축조방법은 길이 265cm, 너비 152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면에 청석판석 1매를 깔아 주검을 안치할 시상을 마련하였다. 네 벽도 청석판석으로 시상석에 걸쳐서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4~5단 정도 남아있다.
석관의 벽은 남장벽-동단벽-북장벽-서단벽 순으로 축조되었으며, 석관의 규모는 길이 158cm, 너비 38cm, 높이 33cm정도이다. 유물은 남장벽의 중앙부 시상위에서 돌화살촉 1점이 출토되었다.
▲ 전시장 동편 바닥 석관묘의 모습이다.
▲ B-1구역 35호 석관묘
석관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방향은 남-북향이다.
축조방법은 길이 245cm, 너비 137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면에 길이가 긴 청석판석 1매를 깔아 주검을 안치할 시상을 마련하였다. 네 벽도 편평하게 다듬은 청석판석을 구덩이의 바닥에 홈을 파서 세운 후 "ㅍ"조립하였다. 석관의 규모는 길이 150cm, 너비 35cm, 높이 30cm정도이다.
▲ B-1구역 25호 석관묘
이곳 무덤에서도 붉은간항아리1점과 돌화살촉 8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석관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방향은 납-북향이다.
축조방법은 길이 322cm, 너비 223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면에 잔자갈을 깔아 주검을 안치할 시상을 마련하였다. 네 벽은 산돌과 강돌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5~6단 정도 남아있다.
석관의 규모는 길이 132cm, 너비 75cm, 높이 63cm정도이다. 유물은 붉은간항아리 1점과 돌화살촉 8점이 시상윙에서 출토되었는데 붉은간항아리는 남서쪽 모서리에 바로세워 놓아 두었다.
▲ B-1구역 21호 석관묘
이곳 무덤에서도 돌화살촉 10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석관묘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방향은 동-서향이다.
축조방법은 길이 294cm, 너비 174cm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바닥면에 청석판석 2매를 깔아 주검을 안치할 시상을 마련하였다. 네 벽은 산돌과 강돌을 사용하여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5~6단 정도 남아있다.
석관의 규모는 길이 211cm, 너비 66cm, 높이 79cm정도이다. 유물은 남장벽의 중앙부 시상위에서 돌화살촉 10점이 가지런히 출토되어 무덤에 부장할 당시 다발로 묶어 넣어둔 것으로 보인다.
▲ 위 사진은 금년 2월 4일에 찍은 것으로 당시에는 석관묘 보수공사를 위한 것이었는지 푸른 천막으로 덮어 놓았었다.
유적공원내 유구전시장의 내외부와 전시물 등을 살펴 보았다.
비록 그 규모는 외소하지만 개발에 밀려 흔적없이 사라질뻔한 유적들의 일부를 한자리에 모아 어린세대에는 역사의 교훈장으로, 기성세대에는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기억의 한켠으로 남겨두게 되었음은 참 다행한 일로 보인다.
유적공원은 규모가 크지않은 만큼 별도의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특히 화장실이 없어서 불편했는데 현재 공원 입구 좌측에 화장실을 신축 공사중이다.
황경림나무와 동호서당, 유구전시장을 돌아봤고 이제 마지막으로 유적공원과 북서쪽으로 400여미터 떨어진 동곡지 에코로드를 돌아보고자 한다.
대구혁신도시 안에는 신지, 나불지, 신서지 등 다양한 크기의 저수지가 있는데, 이 중 동곡지는 2012년 국토해양부가 주관한 개발제한구역내 친환경 문화사업 공모를 통해 대구에서 유일하게 선정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의 휴식 및 문화공간, 일명 동곡지 에코로드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동곡지는 해방 전에 착공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1961년에 준공한 그다지 크지 않은 자그만 저수지며, 안심역에서 초래봉 사이 승방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팔공산 왕건길이 조성되면서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동곡지라는 명칭은 이곳의 옛 지명이 동곡(東谷) 또는 내상(內上)이라고 한데서 연유한다.
▲ 동곡지에 접근하는 방향은 크게 두갈래이다. 못둑 우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오르는길과 못둑 좌측 아스콘 포장도를 따라 오르는 길이다. 사진은 못둑 우측 시멘트 길을 따라 못둑으로 접근하는 길이다. 오른쪽 비포장 공터에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다.
▲ 잠시 길을 따르면 좌측으로 시멘트 길을 벗어나 좁다란 오솔길이 열려있고 ~
▲ 앞쪽에 붉은 색깔의 수문이 보이며 못가에 다다를 수 있다.
▲ 다른 한편으로 저수지에 접근하는 방법은 못둑 좌측 아스콘 포장도를 따라 오르는 길이다. 왼쪽 비포장 공터에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다.
▲ 도로가 꺾이는 지점에서 포장도는 끝이나고 입간판 두개가 나란히 서있다.
▲ 왼쪽 초례산 숲길 안내도는 최근에 설치되었고 오른쪽 철구조물 동곡지 에코로드는 2012년에 설치된 것이다. 글자일부가 떨어져 나가 동곡지가 도곡지(?)로 되었다.
▲ 입간판에서 본 못둑방향의 모습이다.
▲ 못둑 근처로 올라와 입구 방향으로 돌아보면 혁신도시내 가스공사 기숙사 건물이 뒷쪽에 보인다.
▲ 동곡지 남서쪽 못둑위에는 초례산(왕건길) 들머리와 왕건길 표석이 있다.
▲ 팔공산 왕건길 표석에는 이곳을 8번지점(동곡지)로 표기하고 있다.
▲ 왕건길을 알리는 또다른 안내물이다.
▲ 저수지 남서쪽에는 벤취가 설치된 전망대와 동곡지 못을 알리는 안내판이 함께 서있다.
▲ 동곡지 안내판에는 해방 전에 착공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1961년에 준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저수지의 남서쪽에 전망대와 동곡지 안내판이 서있다.
▲ 남서쪽 전망대 위에서 본 동곡지 못 전경이다. 사진 좌측으로 이어진 골이 승방골(장수황씨 승방재가 있음)이며 이 못은 해방 전에 착공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1961년에 준공한 못이라고 한다.
▲ 못둑은 눈.비가 오더라도 질퍽거리지 않게끔 바닥재를 깔아 산책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반시계 방향으로 못둑 산책로를 따라 한바꾸 돌아보기로 한다.
▲ 들어서서 뒤로 돌아 본 모습이다.
▲ 요즘들어 대구지역 산행을 하다보면 산책로에 이와 같은 바닥재를 많이 깔고 있다. 먼지도 나지않고 미끄럽지도 않고 낙엽을 밟을때 처럼 푹신한 느낌마저 준다.
▲ 북서쪽 야산 농경지와 접하는 못둑 가장자리에는 물가를 따라 데크길을 만들어 산책로를 조성하여 운취를 더해주고 있다.
▲ 저수지의 남쪽 못둑(산책로)에서 내려보면 못둑으로 연결된 2개의 진입로가 눈에 들어온다.
▲ 못둑 산책로 좌측에는 왕건길 표시목이 하나 서 있고 그 뒤로 또하나의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 전망대 앞에 서있는 나무는 자세히 보면 두 그루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다.
▲ 반대편에서 본 전망대와 나무의 모습이다.
▲ 가까이서 보니 서로 안고 있는 모습이 더욱 뚜렷하다.
▲ 산책로 수변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가을 억새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 산책로 우측 아래에는 못둑으로 접근하는 좌,우 두개의 길이 보이고 그 뒤로는 동호유적지구가 보인다.
▲ 유구전시장(좌)과 동호서당(우)의 모습을 조금 당겨본다.
▲ 산책로에는 세개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중 한개이다.
▲ 전망대 뒷쪽 북쪽으로 보이는 골짝이 일명 승방골이다.
▲ 지나 온 산책로를 잠시 돌아보며 ~
▲ 못둑 산책로가 왼쪽으로 꺾이는 지점 앞에는 안내판과 대문과 같은 구조물이 서있다.
▲ 안전수칙 등 금지행위 등을 안내하고 있다. 이젠 당연시 되어야 할 이야기다.
▲ 대문의 형상을 띈 구조물인데 봄 여름에는 녹색식물이 대문을 휘덮는다.
▲ 반대편에서 본 모습이다.
▲ 못둑 산책로가 왼쪽으로 휘어지면서 이 부근에 수량을 조절키 위한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 부근으로 남동쪽에서 못둑으로 접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못둑으로 이어지는 길 뒤로는 혁신도시 가스공사 기숙사(좌) 및 첨단의료산업단지 연구동(우)의 전망이다.
▲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의 저수지 전경이다.
▲ 지금은 녹슬고 낡았지만 한때는 이 동네의 젓줄 역활을 했을 저수지 수문이다.
▲ 동쪽 산책로에는 별도의 전망대는 없고 이곳에 벤취2개가 있고, 바닥재는 설치 되지 않았는데 여기도 있었으면~~
▲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
▲ 낙엽과 억새, 혼자 걸어보는 가을 길,,,호젓한 분위기가 좋다.
▲ 조금가면 흙길이 시멘트길로 바뀌고 ~
▲ 데크 산책로와 억새들의 어울림
▲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못위로 물빛을 쏟아낸다.
▲ 북서쪽 못 가장자리의 모습이다.
▲ 북서쪽에서 남서쪽으로는 기존 사람이 다니는 못둑이 없었기 때문에 물가를 따라 데크를 만들어 산책로를 조성하였는데 운취있는 길이 되었다.
▲ 시원하게 뻗어있는 데크 산책로를 따라 간간이 부는 바람을 맞으며 혼자 걷는 느낌, 고즈넉함의 극치이다.
▲ 데크를 걸으며 대문 조형물이 서있는 남동방향의 모습이다.
▲ 3개의 전망대 가운데 한곳이다.
▲ 지나서 돌아본 데크길 모습이다.
▲ 지나서 돌아본 데크길 모습이다.
▲ 데크 산책로에서 본 남쪽 산책로의 모습이다.
▲ 한바꾸를 돌고 저쪽에 출발점이 보인다.
▲ 데크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허름한 이동식 화장실 한개가 있다. 혁신도시 명소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좀 더 관심이 필요할 듯 ~
▲ 이제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다.
▲ 지나온 북서쪽 데크 산책로를 돌아보고 ~
▲ 2010년 6월경 동곡지가 에코로드로 태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저수지 서편에 길쭉한 나무 두그루가 우뚝 서있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데크 산책로를 설치하면서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이지만 더 좋은 환경을 위해서 필요했었겠지 생각하며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언젠가 가족, 친구, 연인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쉼터와 활력의 충진소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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