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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사랑/신서 동네

황경림나무 & 동호유적지구(동호서당, 유구전시장) & 동곡지 에코로드

by 영영(Young Young) 2016. 12. 7.

2016. 11. 30(수)


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개발에 밀려 지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그러나 혁신도시의 기반조성이 완성된 지금 돌아보면 그러한 염려와 관심속에 동내동의 황경림나무, 동호서당, 각산동 마을표석 등 민속자료나 보호수 등을 포함한 문화재 등이 제자리를 지키고 소공원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조성과정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석관묘와 고인돌 등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함으로써 우리 곁으로 좀더 친근하게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동호서당은 유구전시장과 아울러 동호유적공원으로 태어났으며, 황경림나무는 인근지역과 함께 여울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각산동 마을표석은 유적공원으로 옮겨왔다. 나아가 인근에 있는 동곡지 못을 친환경 에코로드로 새단장 한 후 탐방객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뻔한 위기속에서 자랑스럽게 자리를 지켜온 황경림나무와 동호유적공원(동호서당 및 유구전시장), 새단장을 마친 동곡지 등을 새로운 명소로 태어나길 기원하는 바램으로 차례로 돌아보았다. 


참고적으로 각 사진은 금년 2/4, 2/28, 11/22, 11/28, 11/29, 11/30 등 여러날에 걸쳐서 본인이 찍은 사진이 같이 혼재되어 있다.






▲ 황경림나무, 동호유적지구(동호서당, 유구전시장), 동곡지의 위치도이다.   클릭하면 좀 더 쉬원하이 볼 수 있다.



▲ 대구신서혁신도시 개발계획 승인서 34쪽에 의하면 동내동 느티나무(황경림 나무)등에 대한 보존대책을 수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계획에 따라 동호유적공원(동호서당), 여울공원(황경림나무) 등이 원형 그대로 또는 새롭게 조성되었다.






황경림 나무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면와(勉窩) 황경림(黃慶霖)이 왜란 후 선조 31년(1598년) 이곳 동내동에 정착하여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나무의 수종은 느티나무로 약 400년의 수령에 키는 10m, 둘레는 5미터가 된다고 한다.


위치는 대구혁신도시 내에 있는 한국가스공사 숙소 및 보육시설 맞은 편 개울가에 자리잡고 있다.

 
긴세월 동안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속이 썪어 내부가 비어 있음에도 해가 바뀌면 어김없이 푸른 녹색을 띄우는 끈질긴 생명력 앞에 왠지 숙연해진다.
대구이야기(http://daegustory.com/daegu-namu/donggu/dong-dongnae251.htm)에 의하면, 8.15광복이 지나고 6.25사변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빨치산 공비들의 만행으로 마을이 폐허화되다 씨피 할 때 이 나무가 불에 탔다고 한다. 그 때 나무가 새까만 색깔로 변하면서 처음에는 잎이 거의 나지 많았으나 3,4년 이후 잎이 조금씩 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것이라고 한다.


수령 400년으로 지금까지 어렵게 자신을 지탱해 왔지만 현 상태를 보면 앞으로의 상황이 결코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상태가 심각하지만 고사되기전에 제2세대를 키우던지 특별한 방안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당산나무로 수 백년을 지내 왔듯이 앞으로도 혁신도시 주민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황경림 나무 인근은 "동내여울공원"을 조성하여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부근에서 북쪽으로 황경림 보호수까지 산책로를 따라 체육시설 및 쉼터를 갖추고 공공기관 직원 및 인근 주민들이 운동과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혁신도시의 조성이 시작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난 상태에서도 텅빈 마을을 혼자서 꿋꿋이 지켜보았던 당산나무가 그때 그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식구를 기다리고 있다. 주말이나 휴일, 아이들이 있는 가족이라면 함께 역사공부도 하고 400년 느티나무에 깃든 의병장 황경림의 충정을 되새겨본다면 의미있는 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 2015년 2월 현재 대구시에는 "역사속의 인물과 나무"로 22개소가 지정되어 있는데 면와 황경림 나무도 이중의 하나로 34년전인 1982년 10월 30일 2-3번으로 지정하였다.



▲ 혁신도시가 조성되기전 가을에 찍은 이곳(동내동 251번지) 황경림 나무의 모습이다. 개발되기전 나무가 있었던 주변환경이 궁금한데 의외로 웹상에서 주변환경과 같이 찍은 사진을 찾기가 힘들다. 나무의 좌후방에 큰 고무다래이가 보이고 우측 후방에는 가옥인지 창고인지 모를 허름한 건물이 하나 보인다. 현재는 안내판이 나무를 중심으로 서쪽에 세워져 있는데 이 사진은 반대쪽인 동쪽(개울이 있는 방향)에 설치되어 있다.



▲ 혁신도시가 조성되기전 여름에 찍은 이곳(동내동 251번지) 황경림 나무의 모습이다. 위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좌후방에 고무다래이 한개가 보인다.



▲ 혁신도시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보호수의 훼손을 염려하는 기사가 영남일보에 실렸다. 이러한 걱정과 관심속에 황경림나무는 꿋꿋이 생명을 이으며 지역을 지켜왔다.



▲ 혁신도시가 조성되기 이전 황경림 나무의 주변 환경을 다음(daum)지도 위성사진을 통해 살펴보았다.  북서쪽 지척에 지금은 각산동으로 이축한 칠보사 건물이 있고 바로 좌측 서편에 건물 1동과 바로 우측 동편에 크고작은 7동의 건물이 있다. 황경림 나무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도로와 개울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약간 비탈진 숲을 이루고 있다.



▲ 혁신도시의 조성공사가 진행되면서 2011년경 다음(daum)지도 위성사진이다. 황경림 나무 좌.우측의 건물은 모두 철거되고 북서쪽 칠보사 건물만이 남아있으며, 영남일보 기사에서 보았듯이 나무 주변에는 팬스가 쳐져있음을 알 수 있다.



▲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한국가스공사 독신자 숙소 및 보육시설이다. 이 시설 맞은편 도로(개울) 건너 황경림 나무가 위치한다. 왼쪽 건물은 첨단의료산업진흥단지 부속건물이다.



▲ 가스공사 기숙사 방향(동)에서 도로 맞은편 개울쪽(서)으로 본 모습으로 나무를 중심으로 둘레에 사각모양의 돌 축대를 쌓아 놓았다.



▲ 동편(가스공사 숙소 방향)에서 본 나무의 밑둥 모습



▲ 올 2월 4일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본 모습



▲ 역시 금년 2월 4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좀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이다. 계절이 겨울이라 검고 앙상한 가지만이 보인다.



▲ 위 사진과 같은 방향에서 올 11월 28일 찍은 사진이다. 나무의 좌측(동편)으로는 개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산책로와 공공시설이 있다.



▲ 역시 금년 11월 28일 북쪽에서 남쪽으로 좀더 가까이에서 본 모습이다. 계절이 가을이라 푸른 잎은 검붉게 변하여 낙엽으로 떨어지기 전이다. 



▲ 북에서 남으로 좀 더 가까이서 ~~



▲ 속이 썩어 내부가 텅빈 모습이 애처롭기만 한데 그렇게 모진 풍상을 잘 견디며 우리 곁에 있는것이 대견스럽다.



▲ 텅빈 속 뿐만 아니라 가지가 쳐져서 버팀목 까지....



▲ 나무의 서쪽편에 안내판 두개가 서있는데 좌편에 서있는 안내판의 모습이다.


황경림(黃慶霖) 나무
위치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251
수종 : 느티나무(느릅나무과)
나무와 연관되는 인물 : 면와(勉窩) 황경림(黃慶霖)
면와 황경림은 경산 하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해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와평,초례산,금호강 등지에서 왜와 싸워 지역을 방어 했을뿐 아니라 망우당 곽재우, 화산군, 권응수 등과 제휴하여 적을 격멸한 것을 비롯하여 영천성 전투와 달성전투, 창녕의 화왕산성에서의 적과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나자 이곳 동내동으로 들어와 후학을 가르지며 조용히 일생을 마감한 분이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된 이 느티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적을 물리치고 왜란후에는 후진양성에 힘쓰신 황경림이 심은 나무라 전해져 오고 있어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황경림나무"라 이름지었다.  대구광역시



▲ 서쪽편에 서있는 두개의 안내판중 우편에 서있는 안내판의 모습이다.


보호수
수    종 : 느티나무      고유번호 : 2-3
수    령 : 380년         지정일자 : 1982.  10.  30
수    고 : 10m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251번지
나무둘레 :  5m           관 리 자 : 동구 동내동 황재원
보로수의 특징(연혁 및 전설)
약 400년전 황희의 6대손 황경림이 곽재우와 같이 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물리치고 선조 31년(1598)이곳에 정착하면서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며 지금은 당제를 지내지 않고 있음.



▲ 금년 2월 나무의 서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당제(堂祭)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지켜 주는 동신(洞神)에게 무병과 풍년을 빌며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인데 동내동 주민들은 수년전까지 황경림 나무를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는 당나무로 여기며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 금년 11월 서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 금년 11월 서쪽 방향의 사진, 좀 더 멀리서 ~



▲ 왼쪽 안내판 뒤쪽에는 밑둥의 가지가 쳐저서 고임목을 버티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 속이 썪어서 비어있는 곳이 북서쪽 방향, 즉 개울과 반대편이다.



▲ 금년 2월 남서쪽에서 본 모습이다.



▲ 금년 11월 같은 위치에서 본 모습이다.



▲ 동쪽(가스공사 숙소측)에서 보는 모습은 특별함이 없다.



▲ 서쪽(안내판이 서있는 곳)에서 보면 밑둥치의 속 대부분이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같은 방향(서쪽)에서 조도를 높혀 보았다. 상태가 심각한 편이다.



▲ 남쪽에서 보면 역시 밑둥치가 타원형으로 뻥 뚫려 있다.



▲ 남쪽에서 본 모습을 확대한 모습이다.



▲ 북쪽에서 보면 서쪽에서 보는 모습과 거의 대동하게 밑둥 속 대부분이 비어있고 횡으로 90도 뻗은 가지를 버팀목으로 지지하고 있다.



▲ 북쪽에서 본 모습을 좀 더 확대한 모습이다. 심각 그 자체다.



▲ 서쪽에서 좀 더 가까이서 본 모습이다.



▲ 서쪽면 좀 더 먼거리에서 내려 본 모습이다. 나무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개울과 편도1차선 도로가 지나고 서쪽으로는 산책로 및 첨단의료산업진흥단지 부지가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북쪽에는 약간의 공터가 있고 그 후방에 도로가 위치한다.
황경림 나무를 사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수령 400년으로 지금까지 어렵게 자신을 지탱해 왔지만 현 상태를 보면 앞으로의 상황이 결코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제2세대를 키우던지 특별한 방안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부근에서 북쪽으로 황경림 보호수까지 개울을 따라 여울공원을 조성하여 산책로와 체육시설 및 쉼터를 갖추고 공공기관 직원 및 인근 주민들이 운동과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은 여울공원 입구의 자그만한 광장이다.



▲ 여울공원 안내판에는 동내동과 신서동의 유래와 공원내에 보호수(황경림 나무)가 있음을 안내하고 있다.
동내동 유래
초례봉 줄기를 따라 동쪽의 마을, 곧 현재의 동내동 지역에 자연부락이 형성되었으며 이후 서쪽에는 현재의 신서동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각 동골과 서골이라 불렀고, 약 230년 전 류씨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면서 동쪽의 부락을 동내동, 서쪽에 새로이 생긴 마을을 신서동으로 불렀다.



▲ 안내판 왼쪽 뒷편으로 개울을 따라 북쪽(황경림나무, 유적공원)산책로를 조성하고 있다.



▲ 산책로에는 벤취가 있는 쉼터와 운동시설 등이 있고 ~



▲ 운동시설의 뒷쪽으로 황경림 나무가 보인다.
황경림 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가스공사 기숙사 인근에 차를 세우고 곧바로 개울가로 내려와 볼 수 있고, 걸어서 산책이나 휴식을 겸해서 살펴 보려면 여울공원 산책로와 어울러 볼 수 있다. 



참고자료

대구 동구 동내동 느티나무  | 나무와 바위

무애동천 2009.08.22 00:34


사람 떠난 마을 한켠…상처투성이 老木만 홀로 남았다

대구혁신도시 개발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대구시 동구 동내동의 느티나무를 찾았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동내동으로 들어서자 길 옆에 버려진 쓰레기와 함께 혁신도시 건설로 인한 분묘 연고자 신고 안내 현수막 등이 눈에 들어왔다.

동내동은 텅 비었다. 얼마전까지 주민들이 살던 집에는 버려진 가재도구들이 곳곳에 쌓여 있고 잡초가 무성하다. 을씨년스러웠다. 어떤 집 나무에는 지난 크리스마스때 장식물이 그대로 달려 있다. 모든 주민들이 떠난 마을에는 가끔씩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지저귀는 참새 소리,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적막감을 깨웠다.

느티나무는 마을 안쪽 자그마한 시내 옆에 자리잡고 있다. 나무 주변에는 울타리가 둘러져 있는데 나무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느티나무가 갑갑할 것 같았다. 느티나무에 대한 배려가 아쉬웠다.

높이 10m, 수령 400여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줄기에는 큼직한 외과수술 자국이 있다. 줄기는 2m정도의 높이에서 갈라진다. 한 가지는 북동쪽으로 90도 꺾어 자라다가 다시 90도 꺾어 하늘로 뻗어가고 있으며 일자형 가지처짐 받침대를 받쳐 놓았다. 다른 가지는 남쪽으로 90도 꺾어 자라고 있다. 남서쪽 줄기에는 외과수술로 인해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가지에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잎들이 삭풍에 흔들리고 나무 앞에는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는 슬픔과 느티나무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느티나무와 이별주를 나누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 400여년 세월동안 주민들과 함께 해온 느티나무는 이제 혼자 남아 텅빈 마을을 지키고 있다. 누가 와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고 보살펴 주는 주민도 없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는 느티나무 앞에서 신세 한탄을 늘어놓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자랑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가끔씩 찾아와 정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참새와 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며 마을 떠난 주민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바람이 전부다.

동내동을 떠나 신서동으로 이사갔다는 황잠태 할머니(75)는 "10여년 전만 해도 주민들이 모여 당산제를 지내던 당산나무다. 주민뿐만 아니라 무속인들도 와서 기도를 드렸다. 마을 어른으로 모시며 정성껏 당산제를 지내면 마을이 평안했다"며 시대가 변해 당산제가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황 할머니는 하루에 한 번씩 동내동을 찾아 옛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의 밥도 주고, 텅빈 마을을 둘러보며 섭섭한 마음을 달랜다.

동내동 느티나무는 '황경림(黃慶霖)나무'라는 또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황경림 선생은 조선의 명재상인 황희의 6대손으로 경산 하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초례산, 금호강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지역을 방어했으며, 곽재우, 권응수 등과 함께 적을 격멸했다. 영천성 전투와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곳 동내동으로 들어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대구시에서는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황경림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느티나무를 '황경림 나무'라고 이름 지었다.

동내동 느티나무가 살아있는 한, 나라를 생각하는 황경림 선생의 애국심은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동내동에 혁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주민으로 들어와 살더라도 지난 400년 세월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느티나무는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



동구 동내동의 느티나무

소재지 : 동구 내동2동 251

출처 : http://daegustory.com/daegu-namu/donggu/dong-dongnae251.htm

지금으로부터 약 390년전 방촌 황희 정승의 6대 손이며 임진왜란 때 참의로 있었던 황경림(黃慶霖)선생이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이 곳에 세거(世居) 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동곡(東谷) 또는 내상(內上)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앞 두 글자를 따서 지금의 동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동내 2동 251 번지에는 밑둥치의 둘레가 5m, 높이 약 10 m나 되는 고목이 한 그루가 서 있다. 경림(慶霖)선생께서 이 동내동에 세거(世居) 할 때 만 해도 이 당나무는 매우 컸다고 하며 수령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당나무에 대한 내력은 참으로 뜻이 깊다. 그 당시는 마을을 보호하는 신(神)이  이 나무에 있다고 하여 해마다 당나무에 제사를 지냈으며 이 나무를 지나는 사람마다 꼭 나무를 향하여 목례를 올리고 지나갔다고 한다.

   8.15광복이 지나고 6.25사변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빨치산 공비들의 만행으로 마을이 폐허화되다 씨피 할 때 이 나무가 불에 탔다고 한다. 나무가 그 때 새까만 색깔로 되었는데 처음에는 잎이 거의 나지 많았으며 3,4년 동안 일이 조금씩 나왔으나 시들어서 나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차츰 일이 무성하게 자라 지금은 우람하고 큰 나무가 되었으니 많은 사람이 죽어서 거의 폐동(廢洞)이 되다시피한 동네가 이 나무의 소생과 함께 차츰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 나무의 생사가 동네의 운명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동호유적공원으로 가보기로 한다.
동호유적공원은 황경림나무에서 북쪽 방향으로 400여미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북쪽으로 보이는 초례산 산줄기 아래 둥근 돔형 지붕이 보이는곳이 유적공원이다.




▲ 유적공원의 입구는 편도1차선 도로가에 위치한다. 혁신도시내 수개의 소공원에 설치된것과 같은 모양의 안내판이 입구에 서있다. 



▲ 입구에 서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동호유적공원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입구로 들어서서 좌측면에 보이는 "전통마당"과 정면에 보이는 "동호서당", 그리고 우측 상단에 보이는 "유구전시장"이다.



▲ 입구에 들어서서 좌측에 파고라가 보이는곳이 "전통마당"이고 정면에 "동호서당"이 보인다.






▲ 아담한 규모의 전통마당에는 세개의 파고라와 벤취등이 마련되어 있어 탐방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 입구로 들어서면 좌측에 소나무 숲을 조성해 놓았고 그 뒤로 환경림나무가 있는 가스공사 숙소 건물이 보인다. 



▲ 동호서당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는 목교를 통하여 유구전시장을 연결하고 있다. 



▲ 동호서당의 우측면 모습이다. 옛담장과 현대식 담장의 퓨전담장의 모습이 이채롭다. 본 사진은 금년 2월 4일 사진이다. 토담의 일부를 개방하여 측면에서 서당건물이 보이도록 배려하였다.



▲ 좀 더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담장 대신에 울타리를 만들어 밖에서 서당 안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 2016년 11월말 현재의 담장 모습이다. 이전에 개방되었던 토담 부분을 막아 놓았다.



▲ 좀 더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인데 새로 담장을 쌓아 연장한 부분은 기존 있었던 토담보다는 색상이 짙어서 구별된다. 이전 울타리로 개방된 부분이 좋아 보였는데 관리인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 무단으로 출입자가 많아서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겠지...



▲ 동호서당의 입구부분과 서당을 둘러싼 토담의 모습이다. 토담옆에 서당을 호위하듯 서있는 은행나무가 위풍있는 모습이다.




▲ 서당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는 목교를 통하여 유구전시장으로 연결된다. 일단 동호서당을 돌아보고 이곳으로 되돌아와 유구전시장으로 가기로 한다. 


  동호서당(東湖書堂)

출처 : 사단법인 대구 문화유산
홈페이지(http://dgch.or.kr/sub01/sub01_3_2.asp?)f_idx=413


문화재종별 : 비지정문화재 

명칭(한자) : 동호서당(東湖書堂) 

분야 : 목조건축물 

형식/형태 : 민도리,팔작지붕,홑처마 

규격/크기 : 정면4칸, 측면1칸 

년대/시대 : 1820년신축, 1876년중건, 1921년중수(서당으로 개칭), 2013년12월 중수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91번지 


이 건물은 의병장 면와 황경림(勉窩 黃慶霖 1566~1629)을 위하여 하양현 사림(士林)들이 1820년(순조 20) 동곡동에 세운 동호사(東湖祠)에서 유래한다. 동호사는 1872년 조선 고종때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수년간 방치 하였다가 1876년 본 건물을 중건 하였다. 그 후 1921년 중수(重修) 하면서 후학들을 講學(강학)하기 위해 서당(書堂)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2013년 12월 신서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다시 중수(重修) 하였다.
"동호서당중수기(東湖書堂重修記)"에 보면 대암(臺巖) 최동집(崔東집),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도 이곳에서 수학(修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황경림(黃慶霖)은 조선 세종때 정승이던 황희(黃喜)의 후손으로 이곳 동내동의 입향조이다.
자는 경서(景瑞), 호는 면와(勉窩)로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하양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권응수(權應銖),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을 높게 평가한 조정에서 여러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학문을 토론 하였다. 사 후 창의공신(倡義功臣)의 휘호를 받았다.

서당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좌측에 2칸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2칸 마루를 두었는데 전반적으로 소박하게 건물을 꾸몄다.



▲ 서당 앞 삼거리에서 왼쪽편이 동호서당의 입구이다. 입구 담장의 그림들이 단연 돗보인다.



▲ 담장에는 천자문 한자풀이를 귀여운 그림과 함께 전시하였는데 그림을 통하여 옛 서당이 어떤곳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하나하나 돌아보자.



▲ 입구로 들어서서 왼쪽편 담장에는 천(하늘)지(땅)주(집)생(낳을),  일(날)월(달)운(구름),  야(밤)광(빛)과(과실)  3개의 구절을 그림과 같이 전시해 놓았다.



▲ 입구로 들어서 정면 담벽에는 식(먹을) 정(바를) 문(물을),  장(마당) 석(저녁) 발(필) 수(머리) 왕(임금),  장(긴) 명(이름) 3개의 구절을 그림과 같이 전시해 놓았다.



▲ 이후 서당 대문으로 들어가는 담장에는 두개의 그림이 더 붙어 있는데 ~~



▲ 화(물) 목(나무) 호(좋을) 휴(쉴),  천(내) 전(밭) 이(귀),  2개의 구절을 그림과 같이 전시해 놓았다.



▲ 서당 대문 앞에서 입구쪽으로 돌아 본 모습으로 벽면에 붙어있는 한자풀이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전통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것 같다.



▲ 서당 입구 대문 오른쪽에는 안내판이 서있다.



▲ 신서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2013년 12월 새로 중수되고나서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잠시 2013년 현재의 건물이 중수되기 이전의 동호서당 모습을 살펴보자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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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정씨 대구경북화수회,  카페주인 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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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사진은 혁신도시의 기반공사가 시작되면서 서당 주위 건물이 모두 철거된 상태이다. 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은 시멘트담, 오른쪽은 토담이고 서당의 좌우에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 마당과 방2칸 마루2칸의 서당건물의 우측에는 담장이 보이지 않는다.



▲ 서당 우측에서 보니 마루 2칸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고 "동호서당" 편액도 걸려 있음을 볼 수 있다.



▲ 서당 건물의 좌측면이며 시멘트 담과 은행나무 그 뒤로 서당건물과 대문이 보인다.



▲ 서당 대문 옆에도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 잡초가 무성한것을 보면 얼만큼 비워 두었는가 보다.



▲ 서당의 우측 앞에도 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 서당 우측 은행나무 옆에는 보호수 안내판이 서있다.



▲ 서당 우측 후방에는 갈대들이 줄지어 서있다.



  여기서 잠깐 "영사재(永思齋)"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대구시 동구 동내동 101번지에 위치한 영사재는 1948년 장수인(長水人) 면와(勉窩) 황경림(黃慶霖)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동호서당(동내동 91번지)과는 직선거리 50m도 안되는 지척에 있는데 2010년 5월과 6월 두차례에 걸쳐서 초례산을 오르내리면서 눈에 띄던 재실이 지금 알고보니 영사재인데 다음 위성지도에 의하면 2011년도에 철거된 상태이다.
좌상에서 우하로 동곡지, 영사재, 동호서당의 "다음(daum)지도" 모습이다. 2008년 현재 동내동의 가옥과 길의 형태를 볼 수 있다.




▲ 영사재(좌)와 동호서당(우) 지역을 확대한 모습이다. 두 건물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50m내외다. 두 건물다 장수황씨 문중의 재산이지만 혁신도시 조성으로 영사재는 사라지고 동호서당은 남게 되었다.



▲ 2010년 5월 칠보사를 지나 초례산으로 가기위해 영사재 앞으로 접근하는 사진이다.



▲ 2010년 6월 초례산에 갔다가 하산길에 만나게 된 영사재 건물의 뒷 모습이다.



▲ 2010년 5월 초례산에 오르는 길에 만난 영사재 앞 대문과 본체 모습이다.



▲ 웹상에서 가져온 영사재의 모습이다.



▲ 웹상에서 가져온 영사재의 모습이다.



▲ 웹상에서 가져온 영사재의 모습인데 이전에 기둥에 걸려있던 현판도 떼어내고 전면에 유리샷시를 설치하는 등 현대식으로 개조한 모습이다. 혁신도시 조성으로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이 아닐까 추측된다.



▲ 혁신도시 조성과 더불어 2013년에 중수된 현재의 동호서당 건물이다. 방2칸, 마루2칸이다. 방 앞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다.



▲ 서당 우측에는 큰 은행나무와 보호수 안내판이 서있다. 사진은 금년 2월달에 찍은것으로 담장 대신에 일부 울타리가 쳐있지만 현재는 울타리 부분을 토담으로 쌓았다.



▲ 은행나무 키가 20미터나 된다고 한다. 노랗게 물들었을때 보면 더욱 운취 있을텐데 ~~



▲ 보호수 안내판
동호서당의 좌우에 서있는 은행나무 2본을 2000년도에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조선후기 서원 철폐시기에 재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재실의 무사건재를 기원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 서당내에는 편액 2개가 걸려있다.



▲ 동호서당



▲ 동호서당 중수기



▲ 우측면에서 본 모습



▲ 서당 후면 모습



▲ 올2월의 모습으로 담장의 일부를 개방하여 울타리를 두르고 내부를 볼 수 있게끔 한게 좋은데 지금은 토담을 쌓았다.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만,,,



▲ 대문앞에 자리한 또 한그루의 은행나무




▲ 서당 후면의 모습으로 마루 뒤칸 문 2개는 중수이전의 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것으로 보인다.



▲ 서당의 북서편에서 본 모습이다. 서당의 후면과 마당일부, 대문이 내려 보인다.



▲ 서당의 서편에서 본 모습이다. 서당의 서편에는 인근에 있는 동곡지 못 방향으로 연결되는 산책로가 있다.



▲ 북서편에서 본 모습



▲ 북서편 떨어진 거리에서 본 모습으로 유적공원 입구부분과 전통마당, 동호서당, 그 앞을 흐르는 개울, 개울을 가로지르는 목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 동호서당에서 유구전시장으로 연결되는 목교위로 올라와 내려 본 모습이다.



▲ 서당 북동쪽에서 떨어져 본 모습이다.




참고자료

오마이뉴스,  16.06.14 18:54,  글: 정만진(daeguedu) 편집: 박혜경

동호서당(東湖書堂)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91번지에 있다. 세칭 '동구 혁신도시' 안으로 들어가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거의 닿았을 즈음에야 만날 수 있는 서당이다. 이름이 동호서원이 아니라 동호서당인 것을 보면 이곳에는 사당(祠堂)이 없다.

하지만 서당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첫 문장은 '이 건물은 의병장 면와 황경림(勉窩 黃慶霖, 1566-1629)을 위하여 하양현의 사림(士林)들이 1820년에 세운 동호사(東湖祠)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부터 말한다. 1820년 처음 건립되던 당시에는 서당이 아니라 사당이었다는 뜻이다.

1872년 서원 철폐령을 겪은 동호사는 '1875년 본 건물을 중건하였고, 1921년 중수하면서 서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2013년 12월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 탓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동호서당 건물은 아직 대패질 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는 듯한 새 목재와, 회색빛 창연한 옛날 목재들로 뒤섞여 있다.

동호서당은 왼쪽에 온돌방 두 칸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마루를 두 칸 두었다.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로 방을 놓지 않은 점이 눈길을 끈다. 안내판은 동호서당이 '전반적으로 소박하게 건물을 꾸몄다'라고 종합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물론 안내판이 황경림에 대한 해설을 빠뜨릴 리 없다. '조선 세종 때 정승이던 황희의 후손으로 이곳 동내동 (황씨의) 입향조(入鄕祖, 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조상)'인 황경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양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응수, 곽재우 등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을 높게 평가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사후 창의공신(倡義功臣)의 휘호를 받았다.'

선사 유적지에서 내려다 본 동호서당. 보호수로 지정된 두 그루 은행나무가 인상적이다. 
서당 앞뜰을 좌우로 가득 채우고 있는 두 그루 거대한 은행나무가 우람하다. 나무 앞에는 이 두 그루 은행나무가 '수령(나무의 나이) 200년, 수고(나무의 높이) 20m, 나무둘레 1.2m'이고, 2000년 11월 18일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보호수의 특징(연혁 및 전설) : 조선 후기 서원 철폐 시기에 재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재실의 무사 건재를 기원하면서 옮겨심었다'로 끝난다.

동호서당은 뒤편에도 특별한 볼거리를 거느리고 있다. 선사 유적이다. 고인돌 등 역사 시대 이전의 유적들을 서당 바로 뒤 개울 건너 얕은 구릉에 모아 놓았는데, 하나하나 친절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답사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땡볕이 뜨겁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도 전혀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늘을 푸른 보호 시설로 덮어놓았다. 이만하면 동호서당은 선사 시대와 임진왜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역사유적지라 하겠다.

동호서당이 황경림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집이므로, 의병장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경산문화원이 펴낸 <경산의 산하>는 1592년 4월 25일에 왜적 100여 명이 와평, 지금의 와촌마을로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민가를 약탈하였는데, 신해 의병대장 등 하양 지역의 의병들은 악전고투 끝에 적들을 격퇴, 영천 경계까지 맹렬히 추격했다고 전한다. 그날 의병들은 장창 35자루, 조총 25자루, 백납으로 도금한 나무칼 여러 자루, 사람의 눈을 현혹시킬 수 있는 이상한 장식을 한 병기들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았다.

4월 27일, 경산의 최대기 의병장이 하양 의병진에 합류한다. 이 무렵 최동보 의병장은 (대구 동구) 해안과 (연경서원이 있던) 화담 사이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다. 그런데 4월 30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용궁현감 우복룡이 아군을 몰살시킨 사건으로, 이곳에서는 생략. '의병들 반란군으로 몰아 학살한 사건, 사실일까?' 기사 참조)

5월 2일, 하양 일대 신해 의병대장은 최대기 장군과 논의 끝에 대구의 최동보 의병장에게 서신을 보낸다. 영천의 권응수 장군과 세를 합치자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다음날 신해 의병대장은 "하양은 작은 마을이고 왜적도 크게 쳐들어오지 않을 것인즉 그리 염려할 게 못된다, 우리 모두 신령으로 가자!"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황경림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군사의 일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어서 늘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왜적이 이러한 허점을 노려서 공격해 온다면 우리 고장은 누가 지킬 것입니까? 차라리 군사를 나누어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결국 신해 의병대장은 군사를 나누어 그날 바로 신녕으로 가서 권응수 장군과 합세한다. 5월 8일, 하양의 선비들은 다시 서당에 모여 신해 장군 대신에 황경림 장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다. 황경림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자처하면서 사양했지만 결국 많은 이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의병대장의 소임을 맡게 된다. 요약하면, 황경림은 하양 지역의 2대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선비였다.

당연히, 황경림 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대구 시지>가 아니라 <경산 시지>에 실려 있다. <경산 시지(1997)>는 '하양현 창의 8의사(八義士)' 소개 지면을 별도로 마련하고 있다. 여덟 분의 의사는 신해, 김거, 허대윤, 허경윤, 박능정, 박붕, 허응길, 그리고 황경림을 가리킨다. 황경림 의병장 소개 부분을 읽어본다.

'(황경림은) 장수(長水) 황씨로 자는 경서(景瑞)요, 호를 면와라 하였다. 세종 때 명상(名相) 황희(黃喜) 정승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에 신해와 창의하여 하양 향병(鄕兵, 의병)을 이끌고 영천의 싸움에 참전하여 성을 회복하였고, 신해가 진지를 옮긴 후에 하양의병의 대장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창녕 화왕산성에서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산성을 고수하였다. 순조 20년 경진(1820)에 향사(鄕士, 지역의 선비들)가 안심 동곡동(東谷洞)에 동호사(東湖祠)를 세워 제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