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7(월) 입추전일, 숨이 턱턱 막히는 무진장 더위
내가 고향을 떠난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시골에서 유학생활을 한다고 연합고사를 치루어 대구 소재 학교로 입학한것이 약 40여년전인 1977년도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고향을 일찍 떠나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들 역시 일찍부터 4남 1녀 형제자매들이 대구로 떠나고 부모님만 고향에 계시다가 어머님이 소천하신 후에는 아버지도 대구로 거처를 옮김으로서 고향은 일찌감치 멀어졌다.
그래도 지금까지 꾸준히 1년에 한두번씩 고향을 찾을 수 있었음은 처가가 예천에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마침 큰 녀석이 방학을 맞아 시간을 낼 수 있어서 운전대를 잡는 바람에 편히 고향을 다녀올 수 있었다.
예천에 도착하면서 처남을 만나 우리식구 3명과 같이 곧바로 요양원에 계시는 장모님을 찾아뵙고 문안인사를 드린후에, 얼마전에 이장/합장한 묘소를 돌아보고, 묘소 인근에 있는 옛 유.청소년 시절 꿈이서린 장소를 찾아 보았다.
예천8경중 3경이 용문에 있는데 아쉽게도 용문사와 전통마을(송림)은 더위와 시간땜에 돌아보지 못하고 8경중에 한곳인 "초간정"과 어릴적 친구들과 놀았던 "오미봉을 돌아보았는데 오랫만에 어른이 되어서 또한 어릴적 모습과는 다르게 닥아오는 풍경과 느낌들로 감회가 새로왔다.
▲ 여러군데 흩어져 있던 묘를 이곳 원류로 이장하여 한군데로 모셨다.
▲ 초간정(草澗亭) 앞 전경
암반 위에 올라앉은 정자와 소나무 숲과 계곡이 어울려 우리나라 전통원림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보물찾기를 하고 정자 앞 바위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하였다. 그때 기억으로는 저곳 바위의 높이가 꽤나 높았고, 그 아래로 흐르는 물도 깊었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때의 모습과 느낌은 아니다.
▲ 초간정 원림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두른 정자원림이다. 건너편 송림 사이에서 바라보면 바위 위에 자리한 정자와 소나무 숲, 계곡과 계류, 암반과 암벽 등 모두가 자연으로 하나가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 출렁다리
어린시절부터 있던 추억의 출렁다리지만 이미 이 다리도 그때의 그 다리는 아니고 다시 설치된 다리다. 그때는 짖궂은 친구가 흔들어 될때는 정말 무섭게 느껴 졌었는데, 어른이 되어서 지금 건너보는 다리는 그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 예천 8경(하단 참조)의 하나로 곱히는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집필한 권문해가 지은 정자로 그의 호 초간(草澗)을 따서 지었다.
권문해(權文海)는 1534(중종 29)∼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지(祉)이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던 분이다.
그의 저서로는 우리 나라의 고금문적(古今文籍)을 널리 참고하여 단군시대로부터 편찬한 당시까지의 지리·역사·인물·문학·식물·동물 등을 총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문집으로 『초간집』이 있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대동(大東)’이라는 말은 ‘동방대국(東方大國)’이라는 뜻이고,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사전이라는 뜻이다.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이 중국의 역사 기록을 수록하여 엮은 것에 대하여, ≪대동운부군옥≫은 우리나라의 운별 사전임을 밝힌 것이다.
이 책은 권문해가 대구부사로 있을 때인 1589년(선조 22)에 완성된 것으로 20권 20책으로 목판본으로 인쇄되어 보물 제878호 지정되어 있다.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 약 190종 가운데 우리 나라에 관련된 주요 내용들을 단군부터 선조 때까지를 다룬 내용들을 가려 뽑은 이 책은 선조 22년(1589년)에 완성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펴내지 못하고, 후손 권진락(權進洛)이 순조 12년(1812년)에야 간행하기 시작해 헌종 2년(1836년)에야 완간했다.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임진왜란 이전의 책들을 망라하여 사료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16세기 한글의 모습을 알 수 있어 국어학에서도 중요하게 쓰인다.
최근 남명학연구소 경상한문학연구회 주도로 2007년에 총 20권으로 완간되었다.
▲ 초간정에 붙어있는 편액
초간정의 정문 방향에는 초간정사(草澗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를 지은 후 대사간을 지낸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이 정자의 이름을 ‘초간정사’라 지어 직접 글을 써서 보냈는데 지금 정자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정사(精舍)’란 ‘학문에 힘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 후대에 잘못 전해져 초간정(草澗亭)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정자는 보통 관직에서 은퇴한 사류가 노후의 안식을 위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권세와 탐욕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은일하고자 하는 은둔자에 의해 지어지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안식이나 은일과는 전혀 다른 학문과 집필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 정자가 초간정사라고 한다.
▲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재건되었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탄 것을 고종 7년(187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정자가 불탔을 때 초간정사의 현판이 정자 앞 늪에 파묻혀 있다는 말이 전해졌는데, 늪에 오색무지개가 영롱하여 종손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현판이 나왔다고 한다.
초간정의 대들보를 비롯해서 어릴적에 보았던 그 자재 그대로인것이 많다. 오래지 않아 세월의 흐름속에 하나 둘 새로운 자재들로 개.보수 되겠지만 옛것과 같은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
▲ 오미봉(五美峰)
어릴적 추억이 담긴 오미봉을 찾았다. 어른이 되어 대구와 경산 인근 산은 수없이 찾았지만 정작 고향동네 산은 처음 찾게 되었다. 날씨가 더워서 승용차를 타고 임도를 따라 정상까지 갈 수가 있었다. 정상 바로 아래에 주차를 하고 정장부근에 올랐다. 금당실의 주산인 오미봉은 해발 207.2m의 나즈막한 산으로 정상에는 오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어릴적 이곳 정상은 지금처럼 넓지 않았고 방공호가 있었던것으로 기억된다. 2009년 예천군에서 8억 5천여만원의 사업비를 투자해 오미봉 7만8622㎡를 공원화하여 등산로를 정비하고 정상부근을 평탄.확장하고 조망을 가리던 수목들을 제거하여 지금과 같이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오미봉(五美峰) 다섯가지 아름다움을 지닌 봉우리라는 의미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뒤져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미봉이란
1. 아미반월(雅美半月) : 아미봉에 걸린 반달
2. 유전모연(柳田暮燃) : 하금당실(버들밭)에서 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
3. 선동귀운(仙洞歸雲) : 선동으로 흘러가는 구름
4. 용사효종(龍寺曉鐘) : 용문사의 새벽 종소리
5. 죽림청풍(竹林淸風) : 죽림리 쪽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출처 : 예천 금당실 맛질 마을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著>
▲ 오미정(五美亭)
다섯가지 아름다움을 지닌 정자, 오미봉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보인다.
▲ 오미봉에서 내려 보이는 금당실 마을 전경
금당실(金塘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서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 등이 피해가는 열 곳의 살기 좋은 땅, 십승지지(十勝之地)의 길지(吉地)로 꼽았던 곳이며, 조선을 건국할 때 도읍지로도 유력하게 검토되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15세기 초에 감천 문씨가 먼저 이곳에 들어와 정착을 하였고, 그 뒤 이 마을로 장가 온 사위들인, 함양 박씨와 원주 변씨의 후손들이 마을을 일굴었다고 한다.
금당실 마을은 상금곡동이라고 하여, 동/서/남/북촌을 상금1/2/3/4동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은 어떻게 불릴까?
▲ 30여년전 결혼식을 올렸던 금곡교회 예배당
▲ 용문초등학교
초등학교1학년때면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이다.
▲ 옛 나의집
마지막 내가 살았던 집이다. 지붕은 새로 개량한 모습이고 대문과 담장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나름 이 집은 현대식 건물이었다. 요즘 아파트 거실과 같은 역활을 하는 마루가 있었고, 마루에서 1개의 부엌과 4개의 방을 연결하였다. 어머니가 소천한 이후 고향에 홀로남은 아버지 마저 대구로 떠나 오면서 당시 450만원에 이 집을 팔게 되었다.
▲ 현재의 집주인은 누군지도 모르지만 굳게 잠긴 대문 안쪽을 들여다보니 마당에는 온통 잡풀로만 가득하고 거주하는 사람이 없는 듯, 빈집으로 보인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예천 8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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