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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일상소소

달성공원에는 어떤 기념비가 서있을까?

by 영영(Young Young) 2022. 9. 9.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 (달성동)에 있는 달성공원은 공원 부지 전체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토성을 비롯하여 동물원과 향토역사관 등이 위치하고 있다.  


대구달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달성 서씨(徐氏)들의 세거지였으며, 임진왜란중인 1596년 상주에서 경상감영이 이전해 와 한때 지역 행정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가 민족정신을 짓밟기 위해 1905년 토성 안에 신사(神社)를 설치하고 요배전(遙拜殿)이 들어서면서 공원은 일제 황국신민화 선전장으로 변질된 아픔도 있었으나, 1963년 달성이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고 1966년 일제 잔재를 없앤 뒤 1969년 달성공원을 조성하였고 이듬해인 1970년 달성공원 동물원이 개장했다.

 

 


동물원이 개장된 이후 50여년이 지난 지금 달성공원에는 어떤 기념비들이 서 있을까 살펴 보았다. 

 

 


달성공원 내에는, 관풍루, 최제우상, 달성서씨유허비, 이상화시비, 어린이헌장비, 이상용구국기념비, 허위선생순국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공원은 오전 5시에 개장하며 오후 9시에 문을 닫는다. 그리고 동물 전시는 봄 가을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여름과 겨울에는 오후 7시까지 전시를 연장한다.
언제부터 무료입장이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2000년 4월 이후 무료입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잔디광장에서 공원 입구로 본 모습

 

 

▲ 사슴사 앞에서 공원 입구로 본 모습

 

 

▲ 조류사, 사자사, 호랑이사의 모습

 

1970년 개장한 달성공원 동물원에는 토끼, 얼룩말, 타조, 공작새, 침팬지, 늑대, 물새, 물개, 불곰, 호랑이, 코끼리, 앵무새, 사자, 독수리, 부엉이 등 각종 동물이 있는데, 특히 동물원 개장때 박정희 대통령이 꽃사슴 5마리를 기증했다고 한다. 

 

 

 

 

▲ 곰 사육사

 

▲ 호랑이사

 

 

▲ 코끼리사

 

 

▲ 물개사, 더위를 피하기 위해 차광막을 설치한 모습이다.

 

 

▲ 동물원 개장시간은 계절에 따라 오후 5~7시 까지 조금씩 차이가 있다.

 

 

▲ 공원내 산책로

 

 

▲ 원숭이사 부근의 안내판

 

 

 

 

▲ 지체장애인을 위한 모금함

이 모금함은 50년전인 1972년 대구청년회의소에서 설치하였고 2015년도에 보수한것으로 매년 11월에 개함하여 지체장애우 및 불우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쓰이고 있다고 한다.

 

 

▲ 어린이 헌장비

1958년에 한국 최초의 어린이 헌장비가 이곳에 세워졌다고 하며 이후 노후되어 1970년대에 다시 건립하였다고 한다. 

 

 

 

▲ 석주 이상용 선생의 구국기념비

안동출신의 독립운동가로서 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워서 청년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쓴 석주 이상용 선생의 구국기념비

 

 

 

▲ 왕산허위선생순국기념비

허위선생은 구한말(1897~1910)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구국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돼 서대문감옥에 투옥하던 중 51세의 나이로 교수대에 올라 순국했다. 1962년 10월 3일 왕산허위선생기념사업회에서 새운 비이다.

출처 : 시니어매일

 

 

▲ 대신사수운최제우상(大神師 水雲 崔齋愚像)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1824~1864)는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중심으로, 서양에서 전래한 종교인 "서학"에 대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1864년 1월5일(음) 경상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당하고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언도받고 형조판서의 훈령에 따라 3월10일(양력 4월15일) 대구 읍성 남문 관덕당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으나 1907년에 순종황제에 의해 사면되었다.

 

 

 

▲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

달성공원 정면에서 잔디밭을 지나 오른쪽 서침나무 옆에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가 있다. 석재 서병오(1862-1935) 선생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많은 제자를 배출한 달성서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이다. 달성서씨 대종회에서 1983년 예술비를 세웠다. 선생은 시, 글씨, 그림, 가야금, 장기, 바둑, 의약 등에 능하여 팔능거사라고 불렸다. 

 

 

 

▲ 죽농 서동균 예술비

서병오 선생 예술비의 오른쪽으로 20여 미터 쯤에 죽농 서동균 예술비가 있다. 1902년에 태어나 19세 때 석재 선생에게 서화를 배우고 스승의 예술세계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영남의 대표적인 서화가이다. 죽농이라는 아호도 스승께서 지어 주셨고, 스승이 작고할 때 당시 35세의 서동균에게 자신의 명정을 쓰게 했다고 한다. 1919년 삼일운동 때 대구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광복 후에는 경북여고, 신명여고 등에 재직했으며 1975년 서예부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훈장인 대한민국예술문화상을 수상했다. 1978년 타계할 때까지석재의 유업인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계승해 후진을 양성했다. 비문의 앞글은 죽농 선생의 제자인 동애 소효영 선생이 썼다.

 

 

 

▲ 시민헌장비 시계탑

시민헌장과 시민의 노래를 기록한 시계탑

 

 

 

▲ 달성서씨 유허비(達城徐氏 遺墟碑)

달성서씨 사유로 있던 달성을 조선 세종때 국가에 헌납한것을 기념하여 1971년 달성 성내의 중심부에 '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 이상화시비

일제 강점기 대표적 저항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유명한 상화 선생의 시비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43세에 세상을 떠난 민족시인인 이상화를 기리는 비로 18세때 발표한 '나의 침실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라고 한다. 

 

 

 

▲ 관풍루(觀風樓)

최제우 동상 윗쪽에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관풍루(觀風樓)가 있다. 
관풍루는 1601년(선조 34)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남쪽 정문인 포정문 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감사가 이 건물 위(누상,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觀風世俗)"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관풍루에는 매일 밤 10시에 문을 닫고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의식절차를 올렸는데 이 풍악소리에 맞춰 동서남북 4개 성문을 열고 닫는 의식절차를 엄숙히 행하였다고 한다. 1920년경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겼으나 건물이 노후되어 1970년 해체하였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
- 현지 안내판 옮김 -

 

 

 

▲ 관풍루 주변의 배롱나무와 향나무

▲ 공원내에는 군데군데 노거수들이 자리해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종대왕때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셨던 서침 선생을 기념하는 토성의 수문장 3백년된 서침나무를 비롯, 노거수가 9수종 39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 공원내 잔디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