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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백산인가 바리박산일까? - 2010년 07월 17일 - 매일신문 기사

by 영영(Young Young) 2010. 7. 18.

아래 내용은 - 2010년 07월 17일 -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의 기사내용임을 밝힙니다. 

 

구룡산에서 발백산으로 이어지는 여정과 지명 등의 유래를 자세히 기재하여 산을 찾는 이에게 도움이 될것 같기에 이곳 블로그에 인용하였습니다. 

 

[雲門서 華岳까지] (29)발백산인가 바리박산일까
일제에 왜곡된 우리말 전래명칭 되찾는게 '제2의 광복'

 

구룡산이 일대 지형에 중요한 포인트인 건 틀림없지만, 비슬기맥 흐름에서까지 꼭 그런 건 아니다. 그 점에서는 500여m 서쪽(정상 기준)의 구릉 같은 583m봉이 더 의미 있다. 동에서 서로 달려 온 산줄기가 거기서야 남쪽으로 주향을 전환하기 때문이다. 구룡산 정상부에 있다고 했던 ‘경산구룡’ 마을 자리도 실제는 이 583m봉 서편기슭이다. 엄밀히 말하면 ‘583m봉 마을’인 셈이다.
이 정황을 좀 자세히 보자면, 동에서 달려 온 비슬기맥 본선은 구룡산(675m)을 지나고도 500여m 더 서행(西行)하다가 570m재로 떨어진다. 좁지만 중요한 시멘트도로가 지나는 잘록이다. 경산구룡-청도구룡 두 마을이 이 길로써 이어지고, 그 둘은 이걸 통해 경산 용성면과 청도 운문면 중심지로 더 멀리까지 연결된다.

그 점을 주목한 듯 등산지도들 중에는 이 잘록이를 ‘구룡재’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1대5,000 지형도는 거기 있는 조그만 저수지를 ‘다방못’이라 표기해 놓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재니 고개니 하는 뒷말 없이 그냥 ‘다박’이라 불리던 땅이라 했다. 그러니 굳이 재라 부르려면 ‘다박재’ 정도가 맞을 터이다. ‘다박’이라 할 때는 ‘다’에 악센트가 주어졌다. ‘다방못’은 ‘다박못’을 잘못 알아들은 결과일 듯했다.

583m봉은 산줄기가 다박재를 지난 뒤 올라서는 곳이다. 하지만 마루금 답사자들조차 놓치기 일쑤일 정도로 이것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구릉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릴 만큼 나직할 뿐 아니라, 앞뒤 다른 봉우리들의 훨씬 거센 기세에 묻히기까지 하는 탓이다.

그러나 비슬기맥은 분명 583m봉을 지나고서야 남쪽으로 완전히 굽는다. 그러면서 금방 651m봉으로 솟으니, 경산시청이 “구룡산, 675m, 태백산맥 줄기에 위치했다”고 새긴 돌을 세워 둔 곳이다. 하지만 그건 엉터리다. 이 봉우리는 675m 구룡산이 아닐뿐더러 태백산맥에 있지도 않다. 기껏해야 ‘651m 제2구룡산’으로 불리는 정도다. 더욱이 경산구룡 마을서는 이걸 ‘안산’(案山)이라 부를 뿐이다. 마을의 남쪽에 솟은 마을앞산이라는 뜻이다.

새천년 기념사업으로 경산시청이 세운 산 정상석들 중에는 이런 엉터리가 여럿이다. 앞으로 볼 대왕산 것이 그렇고, 대구 팔공산 관봉 동북편 ‘명마산’ 표석 또한 터무니없다. 하지만 지적해 줘도 고치지 않으니 그건 또 무슨 배짱인지 기가 막힌다.

651m봉에서 정말 주목할 바는 일대가 가톨릭 성소로 다듬어져 있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높다랗게 섰고 짧잖은 거리가 ‘십자가의 길’로 꾸며져 있다. 이 봉우리 바로 동편에 자리한 ‘청도구룡’ 마을의 오래된 역사에 기인한 일이라 했다.

마을에 따르면 청도구룡은 조선조 후반 참혹했던 천주교 탄압시기에 숱한 신자들이 피신해 살던 곳이다. 하지만 다른 신앙촌들과 달리 이곳에선 희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산 속 마을에 170여 년 전 벌써 공소가 설치됐다. 또 지금까지 수많은 성직자를 배출했다. 가톨릭에 특별한 마을인 셈이다.

이 마을은 본래 ‘비석리’였으나 ‘구룡’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청도구룡’이라고 별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본명은 잊혀지고 모두 구룡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651m봉을 지나면 비슬기맥은 410m재로 떨어졌다가 675m봉(바리박산·발백산)으로 솟는다. 고도 기준으로 240m 폭락했다가 260m 치솟는 것이다. 신세대 눈으로는 그 오르내림이 마치 체크(?)무늬 같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중년층에겐 그걸 갈매기 형상이라 분별하던 기억이 있다. 1960년대까지도 많은 제대군인들이 그렇게 부르던 그런 모양의 계급장을 달고 돌아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경시대를 살았던 더 옛날 어른들에겐 그게 ‘질매’의 모습이었다. 소 등허리에 얹어 짐을 싣거나 우마차 채를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길마’가 그것이다. 그걸 뒤집으면 체크 모양이 된다. 그래서 410m재에는 ‘질매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그 동편 정상리 어르신(77)은 이 질매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었다고 기억했다. 아이들은 소 먹이러 넘나들고, 저쪽 영천·경산 등의 어른들은 이쪽에 있는 이름난 약수를 찾아 그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질매재에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났고, 재 꼭대기엔 소공원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질매재를 출발해 오르는데 45분가량 걸리는 발백산은 높이에서 구룡산과 맞먹는다. 그 산과 합작해 북서편의 경산 용성면 매남리(梅南里) 일대를 첩첩산중으로 만들 뿐 아니라, 조금 후 살필 ‘동곡능선’과 더불어 그 남서편의 용성 부일리(扶日里) 공간을 세상 밖에선 안 보이게 꼭꼭 숨겨두는 산덩이기도 하다.

한데 문제는 그 이름이다. 국가기본도가 ‘머리카락 발(髮)’ ‘흰 백(白)’ 자를 써 ‘발백산’이라 적어뒀으나 그게 뭣을 뜻하는지 도저히 알아먹기 힘들다. 어르신들도 연유 몰라 하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마을서는 대신 그걸 ‘바리배기’(바리박이) ‘바리박산’이라 불렀다. 산 북쪽 경산구룡 어르신이나 동편 봉하리 어르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서쪽 송림리서도 한 치 거리낌 없이 이 이름으로 통했다. 그 소리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서 저런 희한한 명칭이 돌출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이름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러는 중이다. 자꾸 그냥 넘겨 둬 될 일이 아니다.

몇몇 연구들을 참고해 짐작건대, 우리 산이나 재는 대개 순수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다. 시루를 닮았으면 시루봉, 매가 모여들면 매봉, 능선이 칼 같으면 칼등, 종지 같으면 종지봉, 갈모 형이면 갈모봉, 상여를 닮았으면 ‘생이산’, 위가 평평하면 마당재, 도마 같으면 도마재, 질매 닮았으면 질매재, 큰 고개면 한티·큰티였다.

그 이름은 왜곡되거나 변질될 위험성도 극히 낮았다. 토박이들에 의해 대대손손 전승되기 때문이다. 외지인이 틀리게 기록해 유통시킬 위험성은 거의 없었다. 가끔 고지도가 극소수 산이나 재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럴 때 역시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이 활용됐다.

그러나 1918년 일제(日帝)가 처음으로 전국 1대50,000 지형도를 완성한 걸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세세한 땅이름까지 지도라는 문서에 실리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작업을 맡은 건 태생적 위협이었다. 우리말 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한자를 사용하다 보니 개똥산이 계룡산으로 바뀌기 십상이었다. 소리를 반영한 것인지 뜻을 번역한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곳곳서 이해 안 되는 한자 이름들이 돌출하고 숱하게 현지 호칭과 상충하는 것은 그 결과일 터이다.

이렇게 됐을지라도 광복 후에나마 우리 발로 열심히 걷고 재조사해 우리말 이름을 회복시켰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90년 전 그때 기록된 산 이름 재 이름이 지금 지도에도 대부분 그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는 20여 년 전부터 불어 닥친 등산 붐을 타고 급속히 확산됐다. 지도가 새롭고 강력한 지명 전승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은 이질적인 명칭을 거부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못한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을 새긴 정상석이 마을 뒷산에 세워져도 체념한다. 스스로의 전승 능력에 자신감을 잃고 활자의 위력에 짓눌린 탓이다. 오히려 틀린 대로 따라하기 바빠할 지경이다. ‘바람 풍’ 해야 할 사람들까지 ‘바담 풍’ 하게 된 꼴이다.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진정한 광복은 거창한 구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래명칭의 회복 같은 작으나마 실질적인 노력들을 통해서야 이룰 수 있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말 전래명칭을 되찾으려 애쓰는 게 옳을 터이나 국가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이제 한 달여 뒤면 광복절이고 다시 2주 후면 국치(國恥) 100주년 되는 날이라고 많이들 목청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효과라곤 일본을 속웃음 짓게 만드는 이상이기 어려울 것이다.

‘바리박산’ 정상은 뛰어난 전망대다. 지나온 사룡산~구룡산~질매재 능선은 물론, 사룡산에서 부산(富山)을 거쳐 흐르는 낙동정맥 능선까지 훤하다. 2007년에 정상석을 세운 청도산악회서 일대 잡목을 베어낸 공이 크다고 했다. 우리 땅 사랑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이 다른 산 다른 능선 곳곳에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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