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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경산의 산/발백산

발백산

by 영영(Young Young) 2009. 7. 28.

 

090727(월) 중복이 지났겄만 장마로 인해 날씨는 덥지 않다. 보도에 의하면 금년에는 장마로 인해 열대야도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덥지않은 선선한 날씨탓에 그야말로 오랫만에 가까운 산을 잡았다. 이제 경산에 소재한 이름있는 산이라면 다 한바꾸씩 돌아봐서 더이상 찾을곳도 없는데 유일하게 남아있던 산이었다.

발백산은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에 소재하는 해발 674미터의 산이다.

현재 청도군 운문댐 상류지역 운문면 지촌리 동경과 서지 사이에 있는 솥바위는 신라때 화랑들이 훈련을 할때 밥을 해 먹던 솥을 걸었던 바위라 하여 아직도 강 가운데 세 개가 솥발처럼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약 1km 정도 산등을 따라 올라가면 장육산(將育山) 육장굴(育將窟)이 아직도 옛 자취가 남아있다. 이 굴에서 산등을 타고 마지막 닫는 곳의 이름은 발백산 일명 바리박산이라고 한다. 이 바리박산은 신라 때 장육산에서 장군 훈련을 마치고 마지막 코스로 말을 달려 깃발을 꼽는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 네이버 지도




 ▼ 홀씨 지도(홀씨지도에는 발백산을 장백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 알맵 지도




▼ 왼쪽으로 가면 용성면 매남4리(경산 구룡마을)로 가게되고, 오른쪽으로 가게되면 오늘의 목적지인 발백산과 청도 운문면으로 향한다.


▼ 경산시(용성면) 와 청도군(운문면)의 경계가 되는 질머리재(도삼재) 직전에 있는 호랑이상


 ▼ 작년 '08. 11. 25, 구룡산에 다녀오는 늦은 시간에 축대에 그려있는 아래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누가 그렸을까 궁금했는데 아직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 아래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은사진이 아니다. '09년 3월경 다른분의 블로그에서 빌려온것이다. 그런데 넉달이 지난 09년 7월27 현재는 축대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금년초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 아래부터가 현재 축대에 그려진 모습이다. 이곳에 그림은 이곳 산불감시요원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 경산의 유명한 석조불인 팔공산 관봉여래좌상이다.


 ▼ 삽살개

경북대학교 어떤 교수가 경산시 하양읍에서 우리의 토종개인 삽살개의 순종의 명맥을 잇기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직진길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로 연결되고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매남4리(구룡산, 구룡공소)가는 길이다.


 ▼ 경산시의 홍보판 같은느낌을 주기에 충분한다. ㅎ













 


  ▼ 십자가의 오른쪽길이 경산시 용성면 매남4리 구룡산(구룡공소)로 가는 길이다.





  ▼ 구룡공소 가기 150여미터 전에 "하늘아래첫동네"라는 토속음식점이 있다



  ▼ 도삼재(질머리재)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가 발백산으로 가는 길이다.


  ▼ 도삼재 쉼터에 서있는 장승 2개(구룡산 천하대장군, 발백산 지하여장군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 경산시 용성면 매남리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의 경계지점인 "질머리재"의 유래에 대한 2010. 7. 17일 매일신문의 기사 내용

 

구룡산에서 651m봉을 지나면 비슬기맥은 410m재로 떨어졌다가 675m봉(바리박산·발백산)으로 솟는다. 고도 기준으로 240m 폭락했다가 260m 치솟는 것이다. 신세대 눈으로는 그 오르내림이 마치 체크(?)무늬 같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중년층에겐 그걸 갈매기 형상이라 분별하던 기억이 있다. 1960년대까지도 많은 제대군인들이 그렇게 부르던 그런 모양의 계급장을 달고 돌아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경시대를 살았던 더 옛날 어른들에겐 그게 ‘질매’의 모습이었다. 소 등허리에 얹어 짐을 싣거나 우마차 채를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길마’가 그것이다. 그걸 뒤집으면 체크 모양이 된다. 그래서 410m재에는 ‘질매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그 동편 정상리 어르신(77)은 이 질매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었다고 기억했다. 아이들은 소 먹이러 넘나들고, 저쪽 영천·경산 등의 어른들은 이쪽에 있는 이름난 약수를 찾아 그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질매재에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났고, 재 꼭대기엔 소공원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 작년에 이곳을 찾았을때는 산불감시초소가 임도옆에 있었다.


 ▼ 지금은 산불감시초소가 인근의 다른곳으로 옮겨졌다.   산불감시초소를 질머리재(도삼재)에서 경산방으로 축대옆으로 옮겨놓았다. 왜 그랬을까? 구지 그럴필요가 뭐였을까?


 ▼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던 자리 뒤로 발백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 들어가는 입구에는 잡목이 내키보다 높았다. 입구에 시그널이 두어개 붙어있다.




 ▼ 입구에 잡목이 최고로 심했고 들어서면 조금 약해지지만 전반적으로 철이 철인만큼 잡목과 가시. 거미줄과 폐목(벌목한 나무더미)이 군데군데 어지러웠다.



 

 ▼ 고사목


 ▼ 538m봉

발백산으로 오르는 길의 오른쪽에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봉우리의 표시인듯 나무 두그루를 베어 놓았고 봉우리의 아랬쪽으로는 청도 정상리 마을이 내려보인다. 봉우리의 왼쪽으로 우회하면 이곳을 그냥 지나칠수도 있다.






 ▼ 삼각점이 있는 588m봉, 538m봉에서 왼쪽으로 틀어 능선과 사면,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면 588m봉에 도착한다.



  ▼ 설치되지 얼마 되지않은 듯한 준희님의 팻말이 붙어있다.





 ▼ 발백산 정상

588m봉에서 직진하여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간간히 임도가 보이기도 하고, 폐무덤을 지나 오르막길로 바위지대를 올라서면 발백산 정상이다. 경산의 여느 산의 정상처럼 이곳 정상도 여전히 좁고 초라하다. 공원이 아니건데 오히려 지금의 상태가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 2010년 07월 17일 -  발백산과 관련한 매일신문 기사

국가기본도가 ‘머리카락 발(髮)’ ‘흰 백(白)’ 자를 써 ‘발백산’이라 적어뒀으나 그게 뭣을 뜻하는지 도저히 알아먹기 힘들다. 어르신들도 연유 몰라 하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마을서는 대신 그걸 ‘바리배기’(바리박이) ‘바리박산’이라 불렀다. 산 북쪽 경산구룡 어르신이나 동편 봉하리 어르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서쪽 송림리서도 한 치 거리낌 없이 이 이름으로 통했다. 그 소리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서 저런 희한한 명칭이 돌출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이름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러는 중이다. 자꾸 그냥 넘겨 둬 될 일이 아니다.

몇몇 연구들을 참고해 짐작건대, 우리 산이나 재는 대개 순수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다. 시루를 닮았으면 시루봉, 매가 모여들면 매봉, 능선이 칼 같으면 칼등, 종지 같으면 종지봉, 갈모 형이면 갈모봉, 상여를 닮았으면 ‘생이산’, 위가 평평하면 마당재, 도마 같으면 도마재, 질매 닮았으면 질매재, 큰 고개면 한티·큰티였다.

그 이름은 왜곡되거나 변질될 위험성도 극히 낮았다. 토박이들에 의해 대대손손 전승되기 때문이다. 외지인이 틀리게 기록해 유통시킬 위험성은 거의 없었다. 가끔 고지도가 극소수 산이나 재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럴 때 역시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이 활용됐다.

그러나 1918년 일제(日帝)가 처음으로 전국 1대50,000 지형도를 완성한 걸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세세한 땅이름까지 지도라는 문서에 실리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작업을 맡은 건 태생적 위협이었다. 우리말 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한자를 사용하다 보니 개똥산이 계룡산으로 바뀌기 십상이었다. 소리를 반영한 것인지 뜻을 번역한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곳곳서 이해 안 되는 한자 이름들이 돌출하고 숱하게 현지 호칭과 상충하는 것은 그 결과일 터이다.

이렇게 됐을지라도 광복 후에나마 우리 발로 열심히 걷고 재조사해 우리말 이름을 회복시켰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90년 전 그때 기록된 산 이름 재 이름이 지금 지도에도 대부분 그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는 20여 년 전부터 불어 닥친 등산 붐을 타고 급속히 확산됐다. 지도가 새롭고 강력한 지명 전승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은 이질적인 명칭을 거부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못한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을 새긴 정상석이 마을 뒷산에 세워져도 체념한다. 스스로의 전승 능력에 자신감을 잃고 활자의 위력에 짓눌린 탓이다. 오히려 틀린 대로 따라하기 바빠할 지경이다. ‘바람 풍’ 해야 할 사람들까지 ‘바담 풍’ 하게 된 꼴이다.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진정한 광복은 거창한 구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래명칭의 회복 같은 작으나마 실질적인 노력들을 통해서야 이룰 수 있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말 전래명칭을 되찾으려 애쓰는 게 옳을 터이나 국가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이제 한 달여 뒤면 광복절이고 다시 2주 후면 국치(國恥) 100주년 되는 날이라고 많이들 목청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효과라곤 일본을 속웃음 짓게 만드는 이상이기 어려울 것이다.

‘바리박산’ 정상은 뛰어난 전망대다. 지나온 사룡산~구룡산~질매재 능선은 물론, 사룡산에서 부산(富山)을 거쳐 흐르는 낙동정맥 능선까지 훤하다. 2007년에 정상석을 세운 청도산악회서 일대 잡목을 베어낸 공이 크다고 했다. 우리 땅 사랑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이 다른 산 다른 능선 곳곳에도 필요할 것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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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청도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다.

 

 ▼ 준희님의 표지판




  ▼ 발백산에서 내려보이는 청도 마을








 ▼ 발백산에서 다시 질머리재(도삼재)로 내려오다보면 왼쪽으로 임도가 나타난다. 이 임도는 질머리재까지 이어진다. 내려가는 길은 임도를 따라 가련다. 잡목과 가시로 팔등이 잔뜩 풀독이 올라있다.


 ▼ 임도는 주로 청석길이고 시멘트길이 가끔씩 번갈아 이어진다.


 ▼ 임도길은 통행이 별로 없어 잡초와 야생화로 무성하다.





 ▼ 질머리재 부근의 차단기


 ▼ 질머리재 쉼터로 되돌아와서 이곳에 주차시켜 놓은 달구지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