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우리나라 천년기념물 제1호인 '도동 측백나무숲' 군락을 이루고 있는곳이 대구시 동구 도동에 소재한 '향산'이고 이곳 마을이름이 '향산마을'이다. 향산마을은 대구시 도심재생사업 대상으로 선정되어 2015년부터 6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도동문화마을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측백나무숲 앞 도로의 확장 및 인도 신설, 커뮤니티센터 신축, 마을 환경정비, 관광 브랜드와 프로그램 운영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향산칠색(香山七色)'은 도동문화마을을 중심으로 관광 및 탐방코스를 7개로 나누어 돌아 볼 수 있도록 휠링코스를 구성한 것이다. 7개의 코스는 모두 도동측백나무숲에서 출발하여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순환형 코스이며 일부 코스는 독립적이 아니라 혼재형으로 예를 들어 단산지R은 4, 5, 7코스에 공유되어 있다.
ㅇ 지난 11월 18일 향산칠색중 제일 처음으로 3코스를 탐방하고 이후 6코스, 7코스 탐방에 이어 오늘 1~2코스 탐방에 나섰다. 1코스는 도동측백나무숲을 출발하여 관음사, 백원서원, 시비동산, 문창공영당 등을 거쳐 출발점인 측백나무숲으로 되돌아오는 3.5km, 1시간 20분 소요되는 구간이고, 2코스는 도동측백나무숲을 출발하여 관음사와 백원서원, 불로고분군을 돌아 출발점인 측백나무숲으로 되돌아오는 5.8km, 1시간 50분 소요되는 구간이다. (도동문화마을 관광안내맵 기준) 집을 나설때는 1코스와 2코스를 각각 돌려고 계획했었는데, 현지에 도착해 2코스를 먼저 시작해서 시비동산을 지나쳤을때쯤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1코스와 2코스를 병합하여 돌아보게 되었다. 1코스와 2코스는 중첩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ㅇ 1코스는 향산칠색중 탐방거리와 시간이 가장 짧은 코스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부담없이 산책할 수 있는 최적의 코스이다. 그래도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문창공영당을 제외시키면 걷기에 대한 부담은 더욱 줄어든다. 1코스의 핵심 포인트가 될만한 시비동산은 그냥 시비만 세워 놓았다고 할 정도로 어수선한 느낌을 주는데 주변을 포함해서 정비한다면 멋진 탐방명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코스는 불로고분군을 돌아보는 코스인데, 조용한 불로천을 따라 걷다가 자동차들이 쌩쌩 질주하는 고속도로 옆을 걷는것이 서로 대조적이며 특별한 경험이었다.
ㅇ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호) 천연기념물 제1호, 면적 35,603제곱미터,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냇가의 오른족 사면에 자라며, 사면의 밑부분은 절벽 비슷하게 급한 암면으로 되어 있다. 쳔연기념물 지정 당시에는 달성의 측백수림이라 하였다가 대구 도동 측백나무숲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높이 5~7m의 1000여 그루 측백나무가 순림(80%이상이 한 가지 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에 가까운 숲을 형성하고 있는데, 소나무.말채나무.느티나무 등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다.
ㅇ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쳔연기념물 제1호 대구광역시 도동 산 180 이곳은 조선초기의 대학자 서거정(1420~1488) 선생이 말한 대구의 경치가 좋은 열 곳 중 제6경에 해당하는 북벽향림(北壁香林)이다. 옛날에는 절벽 앞 개울물이 깊고 푸르렀으며 숲도 훨씬 울창하여 시인들과 풍류객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대구에서 영천, 경주로 가는 길목이어서 길손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천연기념물을 처음 선정할 당시에 측백나무가 집단으로 자라는 곳으로는 가장 남쪽이며, 옛날에는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는 등 측백나무 쓰임의 귀중함을 감안하여 제1호로 지정(1962)되었다. 현재 1,200여 그루의 측백나무가 굴참나무, 느티나무, 굴피나무, 물푸레나무 등과 같이 섞여 자란다. 이 중 일부는 나이가 수백년에 이르나 대체로 키 4~5m, 줄기지름 10cm 전후에 불과하다. 흙 한 점 제대로 없는 바위틈에서 긴 세월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이 측백나무 숲은 지키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이다.
ㅇ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제1호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도동 산 180 불로천의 상류지역에 해발 160m되는 향산이 있다. 이 향산의 북쪽에는 불로천이 흐르면서 높이 100m, 길이 600m에 이르는 절벽에 측백이 자생하고 있다. 측백은 우리나라와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항상 푸른 '상록바늘잎나무'로 떨기나무 또는 큰 키 나무로 자란다. 이곳의 측백수림은 측백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남쪽 한계를 나타내므로 식물 지리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1962년 천연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자연생은 대부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낭떠러지에 남아있다. 이 곳에 자생하고 있는 측백도 처음 지정될 때는 나이 100년, 밑둘레 20cm, 높이 10m나 되는 수천 그루가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높이 5~6m정도 되는 100여 그루의 측백이 잡목과 섞여있다. 또한 숲 아래의 바위 틈에는 일본학자가 여기서 처음 발견하여 새로운 변종으로 이름 붙인 '구와꼬리풀'이 자라고 있다.
ㅇ 관음사 觀音寺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672 낙가산에 자리잡은 이 절은 670년(문무왕 10)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광종때에 심지왕사가 중창하였으며, 1933년 해인대사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절은 이 고장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관음전에 모신 관음보살은 큰 영험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ㅇ 서거정의 대구십영 중 6영, 북벽향림 서거정(1420~1488년) 조선 세종때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겼다. 그는 '동문선' 등을 편찬한 문인이기도 하다. 본관은 대구이며, 그능 항상 고향을 사랑했다. 그는 대구의 아름다운 명소 10곳을 정하고, 그곳에 각각 읆은 시 십수를 남겼다.
ㅇ 서시립(1578~1665년) 1578년(선조 11) 대구 도호부 원북(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대구 도호부로 접근해오자, 일가족과 함께 팔공산 삼성암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시립은 산꼭데기를 오르내리며, 본가에 묻어놓은 이삭을 파와 가족들의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1602년(선조 35) 큰 흉년이 들자 서시립은 동래부까지 가서 쌀을 구하니, 동래 부사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인근 고을의 세미를 바꾸어 주었다. 당시 정승이었던 이호민은 서시립의 효행에 감동하여 밀과와 어육을 내려 주었으며, 전귀 두자를 당호로 삼게 하였다.
ㅇ 백원서원(百源書院)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로 51길 18(도동 487번지) 백원서원은 지방 유림들이 서시립 선생을 봉안하기 위해 숙종 18년(1692)에 창건한 것으로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22년 복원, 1928년 현 위치인 전귀당 부지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서시립은 정한강, 장여헌 선생의 문인으로 인조 24년(1646)과 27년(1649) 벼슬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전귀당은 오봉, 이호민, 백헌, 이경석 등이 서시립의 효행을 칭송하여 지어준 당명이라 한다.
ㅇ 백원서원 1629년(숙종 18) 팔공산 백안동에 창건.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어 1928년 전귀당을 수리하여 백원서원을 이건함. 1945년 화재로 소실. 1945년 복원. 전귀당 서시립 선생의 위폐가 봉안되어 있음.
ㅇ 대구 불로동 고분군 사적 제262호(1978. 6. 23 지정).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335번지 일원 대구 불로동 고분군은 팔공산의 남쪽 줄기가 낮아지면서 금호강의 북쪽 충적평야와 만나는 구릉지에 형성된 삼국시대 고분으로, 현재 210여기의 고총고분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대규모 고분군이다. 1938년 무렵 학계에 알려진 이후 1968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2기의 소형분 조사를 실시하였고, 2001년에는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주능선에 위치한 대형분 2기와 석관묘 10기를 발굴조사하였다. 대형고분은 지름이 약 22m, 높이 6m인 원형의 봉토안에 4기의 수혈식 석관을 순차적으로 덧대어 만들었다.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지면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돌을 쌓아서 축조한 수혈식 석곽형이다. 일부 석곽중에는 가운데에 칸막이를 쌓아 시신을 매장하는 공간과 유물을 부장하는 공간을 구분한것도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귀걸이, 유리구슬, 목걸이 등 장신구와 말 그림이새겨진 토기류, 재갈, 말띠드리개 등의 마구류, 화살촉, 도끼, 낫등의 무기류와 상어(돔배기)뼈 등 음식물 등 다양하다. 이 고분의 조성 연대는 기원후 5~6세기경이며, 불로동 지역을 통솔하던 유력한 정치집단이 조성한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ㅇ 경운재(景雲齋)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91번지 경운재는 경주최씨 시조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과 파조 광정공 및 참의공 3대를 향사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성력으로 문창후 영당 서편에 1995년에 창건하여 고운 선생을 경모하고 그의 사상연찬과 강학지소로 활용하여 왔다. 화강석 축대위에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살려 중당을, 숭례당 동재를, 의인 서재를, 거덕으로 현판을 달고 삼간솟을 대문을 창학문으로, 사방에 담장을 둘렀다.
ㅇ 문창공 영당(文昌公 影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 소재지 : 대구과역시 동구 도동 766-4 이 건물은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912년 경주최씨 후손인 최경교 등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일제 강점기의 백성들에게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세웠다. 최치원은 신라 사람으로 자는 고운이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당나라 희종 6년에 황소가 난을 일으키자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그 이름을 중국 천하에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벼슬을 받았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여러곳을 다니다가 마침내 해인사에서 남은 생을 마쳤다. 이 건물은 장방형으로 둘러쌓인 담장안에 있는데 구조는 정면이 3칸, 측면이 1칸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형식을 하고있다. 문창공 영당은 영정각으로서는 그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솟을 지붕과 기둥머리 장식 또한 특색이 있어 조선후기 목조건물의 전형과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