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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신돌석/화화(火話)

문경새재를 가다

by 영영(Young Young) 2015. 12. 18.

2015. 12. 17  문경새재를 가다

 

근래 기온중 가장 차가운 날씨다. 얇은 가죽장갑을 착용했지만 손이 시릴정도의 차가운 날씨였다. 그나마 바람이 거의 없어 견딜만 했다.

문경새재 3개의 관문은 경상도쪽 1관문에서 충청도 방향 3관문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새재로 1863번지 "암행어사 가든" 앞에서 하차하여 조금 일찍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3관문에서 2관문을 거쳐 1관문까지 역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였다.  옛 과거길로 따진다면 한양에 과거를 보고 내려오는 셈이다. 가든에서 자연휴양림을 거쳐 3관문까지만 약간의 오르막이 있을뿐 3관문에서 1관문까지는 연이은 내리막 길이라서 트래킹에는 더 없이 부담없는 코스였다.

전체거리는 약 10.03km,  소요시간은 2시간 53분이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까지의 험준한 길이 소백산맥의 줄기 주흘산(主屹山, 1,106m)ㆍ조령산(鳥嶺山, 1,017m)ㆍ부봉(釜峰, 915m) 등에 겹겹이 쌓여 있다. 새재는 이들 고개 가운데서도 가장 지름길이었다.

조령천을 따라 영남로의 옛길에 조선시대에 축성한 세 개의 관문 가운데 제1관문인 주흘관(主吃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을 1977년에 말끔하게 단장하여 옛 모습을 되찾아 놓았다.

 

 

문경새재

 

‘새재(鳥嶺, 조령)’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고갯길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갯길 주변에 새(억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새재의 어원에는 많은 유래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 낸 고갯길’이다.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 충청북도 충주시와 괴산군 지역에 걸쳐 있으며, 1981년 6월 4일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영주와 단양의 죽령, 김천과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한양과 영남을 잇는 교통ㆍ군사ㆍ경제ㆍ문화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초점(草岾),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충청도의 한강 유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을 가르는 주된 도로였다.

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영남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크게 패하고 탄금대에서 투신했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음을 한탄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서애 유성룡은 관문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 후 선조 30년(1597)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일자형의 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세 개의 관문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째 관문은 주흘관(主屹關)이다. 숙종 34년(1708)에 설치되었으며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두 번째 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관문은 조령관(鳥嶺關)으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 09:30 학교 출발

이번 교육과정 학생수는 40명이다. 2주 이상의 경우에 야외견학 일정이 하루씩 주어진다. 이번 교육과정에는 학교 예산이 없어서 개인별 교육비에서 야외교육비를 부담해야 했다.

 

▲ 11:18    학교에서 출발하여 거의 1시간 50여분만에 충북 괴산군 연풍면 새재로 1863번지에 위치한 "암행어사 가든" 도착

여기서 차에서 내려 청국장 점심을 먹는다. 아침 먹은지가 얼마되지 않은것 같은데 그래도 3시간쯤 걷자면 먹어둬야지

 

 

▲ 식당앞 맞은편에는 자연휴양림까지의 거리를 안내하는 간판이 서있다.

 

▲ 암행어사 가든

 

▲ 11:20 트래킹 시작,

   지금부터 3관문까지 약간의 오르막 경사가 있지만 완만해서 전혀 부담되지 않는 길이다.  교육생들끼리 삼삼오오 그룹으로 출발하여 1관문 지나서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 11:23 어사또가 걷던 길

어라?  우리가 출발했던 방향으로 화살표가 있다. 그럼 어딘가도 모르고 지나왔다는 말씀

 

 

▲ 11:28  날씨가 꽤 쌀쌀하다. 아마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은 미처 장갑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일껄 ~

조령산 휴양림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몇몇 식당들이 들어서 있는데 식당 앞 돌탑이 인상적이다.

 

▲ 11:28   조령산 휴양림 입구

 

▲ 11:29

 

 

 

▲ 11:29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구

휴양림은 오른쪽,  우리는 3관문을 향하여 왼쪽길로 진행 ~

 

▲ 11:29 연풍새재 옛길,  여기서 부터 3관문까지 1.5km, 30분 소요

연풍새재가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문경새재(경북에서 지은 말), 연풍새재(충북에서 붙인 말)이다. 즉 문경새재는 대부분 경상북도의 도립공원으로 경북에서 주관리를 맡고 있지만 충북에서도 사진과 같은 안내판을 설치하고 문경새재라는 표현 대신에 충북 괴산의 연풍지역명을 따서 "연풍새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밋는 기사가 있어서 인용해 본다.

 

연풍새재 마케팅,    수정 2015.11.11 20:02

2013년 11월 조령산 새재 충북구간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새재 충북구간 옛길이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연풍새재라는 이름도 얻었다.

콘크리트로 덮인 옛길을 복원하고 새 이름도 생긴 이후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자연히 여러 가지 할 일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 하나가 연풍새재~문경새재 간 농어촌버스 개설이었다. 괴산 연풍에서 새재를 넘으면 경북 문경이다. 거리가 제법 멀다. 하지만 출발지로 되돌아올 대중교통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셔틀버스 운행 구상이 나온 것이다. 연풍과 문경을 오가는 셔틀버스는 새재를 찾는 이들에게 필요한 대중교통수단이다. 여행객들이 선택적으로 조령산, 새재의 자연인문 콘텐츠를 즐기고 체험하도록 여건을 갖출 필요에 따른 것이다.

연풍에서 새재를 넘거나 문경에서 새재를 넘거나 어떤 경우든 되돌아가야 한다. 새재를 찾는 다수 사람이 되돌아갈 때는 지치고 힘든 상황을 맞는다. 결국 걷기보다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충북도가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셔틀버스 개설을 경북도와 문경시에 연풍새재 옛길 복원 직후 타진했다. 그런데 경북은 그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국토교통부까지 이 구간 농어촌버스 신설문제를 가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연풍새재와 문경새재 간 농어촌버스 개설 승인이 났다.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양쪽을 20분 만에 오갈 수 있다고 한다. 작지만 연풍새재에 더 많은 사람이 찾도록 하는 인프라가 구축된 것이다.

농어촌버스 노선 개설은 충북이나 경북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경북과 문경은 협조를 하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새재의 자연인문화적 콘텐츠를 오래전에 선점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문경시 조령산은 경북도립공원이다. 새재를 비롯해 조령산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한 경북도가 오랫동안 관광자원개발을 위해 집중 투자했다.

자연자원을 보존하고 영남대로의 길목인 새재 옛길을 과거길로 복원했다. 그리고 옛 이야기를 부활시켰다. 각종 드라마세트도 유치해 새로운 관광자원을 만들었다. 그런 투자와 노력은 ‘새재’를 ‘문경새재’로 인식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수백만명이 찾는 전 국민이 아는 유명한 관광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굳이 연풍과 문경을 잇는 셔틀버스에 관심 둘 일이 있었겠는가 싶다.

셔틀버스 운행은 경북도와 문경시가 애초부터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 조령산도립공원 주변에 온천을 개발하는 등 머무는 관광지를 추구하고 있는 경북과 문경이다. 연풍새재를 넘어선 사람들이 좀 더 머물게 해야 할 판에 되돌아가는 편한 대중교통수단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충북이 연풍새재를 부활시켜 마케팅을 시작한 것 역시 그들은 상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풍새재에 대한 경계심리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연풍새재 마케팅을 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경새재를 뛰어넘는 날이 올 때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다시 찾고 싶은 연풍새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연풍새재 마케팅의 핵심이다.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1:38 새재를 노래한 시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임억령이 새재에 대하여 읆픈 시인데 공명의 부질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옛날 이 길을 넘던 수많은 선조들의 감흥과 애환을 떠올리며 새재를 걷는 것은 사색휠링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새재를 넘으며 이렇게 읊고 있다.

 

嶺路崎山虛苦不窮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危橋側棧細相通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長風馬立松聲裏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盡日行人石氣中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幽澗結氷厓共白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老藤經雪葉猶紅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 있네)

到頭正出林界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西望京華月似弓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 11:40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생태교육장은 출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1-10번지 조령산 자연휴양림내에 지하1층 지상2층 건물로 백두대간의 역사와 문화, 생태정보를 다양한 전시 체험매체로 구성하여 놓은 곳이라고 한다.

삼관문은 약 700미터, 10분 정도 남았다고 한다.

 

▲ 11:44 조령산 휴양림 휴게식당

 

 

 

 

▲ 11:44  사방댐

 

▲ 11:47 수로가 요렇게도 운취있게 맹글어 놓았네

 

 

▲ 11:50 과거길

새재 과거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재미있게 표시해 놓았다.
옛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중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 11:50 청풍명원 고개 이야기

청풍명월 고개 이야기는 충북제일의 고개, 즉 연풍새재를 일컫는 말이다. 꿈을 안고 꿈을 걷는 길이 연풍새재라는 말씀이다.

 

▲ 11:50 연풍 조령정

 

▲ 11:51

 

▲ 11:51  연풍새재 일출 조형물
2013년 11월 1일, 충청북도에서 세운 조형물로 조선 제일의 고개 연풍새재, 그 길의 중심에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과 파릇파륵 돋아나는 새싹을 조형적으로 재해석하여 "생명의 땅 충청북도"의 희망과 미래를 표현하였다. 한양에서 부산진까지의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표현.

 

 

▲ 11:51  백두대간 조령 표지석

2006년 12월 20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 조령 표지석으로 조령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재 혹은 새로 된 고개라서 새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대로라 불렸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 한국의 아름다운 길

문경새재는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포함되었다.

 

 

 

▲ 문경새재 도립공원 안내도

 

▲ 11:52  삼관문(조령관)

삼관문 앞에서 사진도 찍고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이곳이 1~3관문중 제일 높은곳으로 이곳을 통과하면 100% 내리막 길이다.

 

 

 

 

▲ 11:59 영남제삼관

삼관문의 문경방향에서 본 모습, 제3관을 통과 하였으니 이제는 충북(괴산)에서 경북(문경)으로 넘어왔다. 지금부터는 경상도 땅이다.

 

 

 

 

▲ 12:02  삼관문을 지나 돌아보고 ~

  여기서 부터 제2관(3.5km), 원터(5.2km), 제1관문(6.5km) 까지의 거리 표지석이 서있다.

 

 

 

▲ 12:15   동화원

3관문(1.2km), 2관문(2.3km), 1관문(5.6km)

 

 

▲ 12:16  동화원 휴게소

휴게소 입간판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의 내용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동화원은 옛 주막촌으로 지금은 그때의 흔적은 전혀없고 다만 현대식 휴게소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 12:16  널찍한 고속도로

어찌 옛 과거길이 이렇게 고속도로 같았겠습니까?  통상 국립공원, 도립공원급은 이렇게 대로 같습니다.

 

▲ 12:19 

과거길이 계곡과 함께 1관문까지 이어진다.

 

 

 

▲ 12:24  이진터

3관문(2.1km), 2관문(1.4km), 1관문(4.4km), 동화원(0.9km)

  

▲ 12:25  이진터

임진년 신립 장군의 제2진의 본부가 있었던 자리이다.

임진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치고 정탐할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 장군이 농민 모병균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추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으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이 조선 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 12:31

 

▲ 12:31

 

▲ 12:33  바위굴

 

바위굴과 새재우

설화, 전설은 아닌듯 하면서도 그럴 듯 ~~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여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버지를 찹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 12:34

며칠전에 눈이 오긴 했지만 겨울철임에도 수량이 꽤 된다.

 

 

▲ 12:36   문경새재 아리랑

 

▲ 12:36

정선. 진도. 밀양 아리랑 등은 들어봤지만 문경아리랑? 

문경새재 아리랑도 나름 유력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를 갈 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12:38  조령산 안내석

 

▲ 12:38  부봉 안내석

 

 

▲ 12:39

새재로 가는길을 한시와 국문으로 각각 소개해 놓았다.  아마 옛 선현들이 이곳을 드나들면서 남겨놓은 시 구절이 아닐까 ~

 

▲ 12:40   조곡약수

조곡약수는 제2관문(조곡관) 송림 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천수로서 물이 맑고 맛이 좋은 영약수로 알려지고 있단다.

 

 

 

▲ 12:41   제2관 앞

 

▲ 12:41   영남제2관(조곡관)

  

 

▲ 12:42   조곡교

  

▲ 12:42   조곡교

지금부터 약 38년 전인 77년도에 준공한 다리라고 표시되어 있다.

  

▲ 12:40   조곡관(영남제2관)

 

 

▲ 12:43

조령제2관문 조곡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위치한 관문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분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95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것을 복원한 것이다.  

 

▲ 12:43

3관문(3.5km), 원터(1.8km), 1관문(3.0km)

 

▲ 12:43

 

▲ 12:43   이곳 2관문 부근에 주흘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 모양,  정상까지의 거리는 5.0km

 

▲ 12:44   제2관문 휴게소

이곳에서 잠시 쉬어간다.  동료 3명이 막걸리 한통과 파전 한판을 시켜서 추위와 피로를 달래고 다시 출발 ~

 

▲ 12:44  

 

 

 

 

▲ 12:44   산불됴심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유일의 순수 한글비문

 

▲ pm1:13

  

▲ pm1:13

 

 

▲ pm1:13   소원 성취탑

 

 

▲ pm1:15     영남대로, 옛 과거길(동화원)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및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갈래가 있는데 영남대로인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길이다.

 

▲ pm1:19    용담폭포 비문

 

▲ pm1:19   교귀정  이정표

1관문(2km, 25분),  2관문(1km, 30분)

 

▲ pm1:19    궁예 소개(안내)판

왜 이곳에 궁예 안내판이 서 있을까?

아마 KBS 왕건 드라마 촬영시 이곳에서 궁예의 피살장면을 촬영했던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pm1:20   용추

아마도 교귀정 부근 이곳이 용추계곡? ,  시간 관계상 전혀 옆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패스 ~~ 패스 ~~

 

▲ pm1:20

 

▲ pm1:20   교귀정

사진상 보이는 건물이 교귀정이다.

 

▲ pm1:20   교귀정

 

▲ pm1:20   용추약수

용추샘은 바닥돌을 파고 깎아 샘을 만든 뒤, 반듯한 천정석과 큰 바위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규모와 형태로 보아 옛 길손은 물론 성내 군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샘으로 조곡관(제2관문)축성 당시(선조 27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새재길을 확장하면서 토석에 묻혀 오랜세월 세간에 잊혀있던 것을 2003년 10월 복원 하였다

 

▲ pm1:21   교귀정 이정표

이전 약 100미터 앞에도 이정표가 있었는데,,,,

제2관문(1.1km), 제3관문(4.6km), 원터(0.7km), 촬영장(1.6km), 제1관문(1.9km), 박물관(2.4km)

이곳에서 약 700미터 후방 옛 숙박시설인 원터를 향해 출발 ~~

 

▲ pm1:21   경상감사 도임행차

교귀정은 새롭게 도임하는 신임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여 돌아가는 감사가 관인을 인계 인수 하던곳으로 문경새재 용추폭포 옆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 현감 신승명이 1400년대 후반(1466~1488)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구한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 경상감사 도임행차는 조선시대의 미암일기초와 탐라순력도를 기초로 하여 재현한 것이다.  총 300여명으로 구성된 행차의 순서는 위 사진과 같다.

 

▲ pm1:21   교귀정  안내석
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로 1470년경(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각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 pm1:23   초가집 주막

 

▲ pm1:24    새재에서 묵다

 

▲ pm   새재에서 묵다

 

▲ pm1:24

 

▲ pm1:27   새재에서 묵다

매월당 김시습이 주막에 묵어면서 남겼다는 시구를 바위에 새겨 놓았다.

 

▲ pm1:27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고다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조국순례 자연보호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주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 pm1:31   팔왕 휴게소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32-8

팔왕이 뭘까?  8명의 왕?   여튼 이곳 계곡을 용추, 용담, 팔왕계곡으로 부르고 있는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문경새재 4개의 휴게소중 마지막 휴게소이다.  옛날의 주막인 셈이다.

 

▲ pm1:31   조령산 안내 표지석

 

▲ pm1:34   조령 원터를 복원한 돌담

 

▲ pm1:34   조령원터 안내판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었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문경새재내에만 동화원, 신해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 pm1:35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옛 숙소, 그래도 당시에는 양호한 공익 시설이었겠지

 

 

▲ 사진상 오른쪽 건물은 층고가 높고 마치 수상가옥처럼 바닥에서 띄워서 건물을 세웠다는게 특이하다.

 

 

▲ pm1:36   원터 입구 안내판

조령원터는 옛날 조령원이 있던 자리이다. 원이란 옛 고려시대부터 국가가 관리하던 지방의 숙박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출장중인 관리들을 위해 역원제를 운옇해 지방에 역과 원을 설치했다. 역은 역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공적인 수송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공문의 전달과 관물의 수송 등을 관리했으며, 또 말을 관리하여 마패를 지닌 관원들에게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만큼 말을 제공하는 업무를 하던 곳이다.
원은 지방에 출장을 가는 관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숙소로 일종의 관용 여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리가 어려워 점차 사라지고 그 이름만 남아 현대까지 전하고 있다.  이태원과 조치원, 장호원 등의 지명이 모두 과거에 원이 있던 자리다.
조령원터 역시 터만 남았는데 현재는 초가집을 하나 세워 이곳이 옛 관리들의 숙소인 원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pm1:36   원터 부근의 이정표

교귀정(   km),  옛길박물관(   km), 교귀정(   km),  옛길박물관(   km),  교귀정(   km),  옛길박물관(   km)

 

pm1:37

  

 

 

▲ pm1:38   맑기도 맑지만 이 겨울에 이만한 수량이 어느 계곡에서 흘러 나왔을까?

 

▲ pm1:39  

 

▲ 지름틀 바우

안내판 뒷쪽으로 보이는것이 지름틀 바우

 

▲ pm1:39   지름틀 바우 안내판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다.
참깨. 들깨. 콩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짠다. 기름틀은 맏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 깨를 올려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 내리게 된다.

 

▲ pm1:45   KBS사극 촬영장 오픈세트장

입장료는 2000원,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일단 패스

 

한국방송공사 KBS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사극 대하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하여 2000년 2월 23일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건립한 촬영장이다.

문경새재는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극 촬영장으로 매우 적합하다.

그동안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대조영, 대왕세종 등의 촬영 주무대가 되었고 영화는 스캔들, 낭만자객 등을 촬영하였던 곳으로 유명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 pm1:45

  

▲ pm1:47   나무 뒤로 보이는 건물이 촬영장 오픈세트 건물임

 

▲ pm1:48   KBS촬영장 오픈세트 입구.

 

 

 

▲ pm1:51   같이 동행한 동료가 찍어준 폰카 사진

 

 

▲ pm1:53     문경 선정비군

관찰사, 현감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인데 문경에 산재해 있던 것들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 pm1:55   제1관 앞의 이정표

교귀정(2 km,  35분),  옛길박물관(0.7 km,  15분)

 

▲ pm1:55     드디어 오늘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 1관문 앞 도착

 

▲ pm1:55   제1관 앞의 또다른 이정표

교귀정(   km),  옛길박물관(   km), 교귀정(   km),  옛길박물관(   km),  교귀정(   km),  옛길박물관(   km)

 

▲ pm1:55   영남 제1관

사적 제147호인 주흘관은 숙종 35년(1709년)에 축조되었고, 구한말 항일 의병 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궁문을 1922년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흘관은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협문 2개가 있는 팔작지붕 형태고,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에, 대문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는 11cm나 된다.

 

▲ pm1:56  1관문을 나와서 주차장 방향

 

▲ 1관문(주흘관)과 그 앞의 다리

 

 

▲ 제1관(주흘관)의 옛 모습

 

▲ 제1관문 좌측의 수로의 모습으로 성의 끝이 산과 연결되어 있다.

 

▲ 1관문 오른쪽 수로는 홍예문 형태로 현재 그대로 있으나 성벽 상단부  여장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다.

 

▲ pm1:58   1관문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의 양쪽으로 나즈막한 수로가 있고 그 주위로 넓은 잔디광장을 조성해 놓았다. 

 

▲ pm2:00     1관문을 배경으로 셀프 샷 ~!!     폰카

 

▲ ▲ pm2:01    자연생태공원으로 들어서는 목교

 

▲ 문경새재 자연생태공원

1관문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의 오른쪽 부지에는 절직한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 pm2:01    1관문 앞의 넓은 잔디광장

 

▲ pm2:13   주차장에서 1관문 방향으로 가는 입구에 설치된 비석

문경새재아리랑비와 옛길보존기념비가 양길가에 마주보며 서있다.

 

▲ pm2:20

 

▲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1관문 방향을 본 것으로 사진상 중간에 보이는 기와건물이 옛길 박물관이다.

 

▲ ▲ pm2:20    문경새재 주차장

주차장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후착대를 기다리며 담소

 

▲ 문경새재 주차장

주차장에서 문경읍내 방향 모습이다.

 

▲ pm4:53

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동양식당에서 두어시간 삼겹살 파티와 함께 교육생 회식자리로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