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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나의사랑/신서 동네

칠보사 동곡지 승방재

by 영영(Young Young) 2010. 5. 16.

10. 5. 14(금),  맑음

 

ㅇ 지하철 안심역에서 대구 동구 동내동(지금은 혁신도시 조성으로 폐가 몇채만 간헐적으로 남아있음) 칠보사와 동곡지(못)을 거쳐 승방곡(계곡)을 따라 초례봉으로 오르는 길 삼거리에서 500여미터 떨어져 승방재가 있다. 오늘은 짬을 이용해서 승방재에 다녀왔다.

 

ㅇ 돌아본 코스 : 안심역 → 안심교회 앞 →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 동내마을 → 사당 → 체육시설 → 삼거리1 → 삼거리2 → 승방재 → 삼거리2 → 동곡지(못) → 귀가

 

ㅇ 승방재(勝芳齋)는 대구시 동구 동내동 초례봉 산기슭에 자리한 재사이다. 이 재사는 원래 임란때에 권응수 장군을 도와 영천성을 복성하였고, 망우당과 함께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전쟁이 끝나 동곡 승방곡에 숨어 살면서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던 면와경림공을 연차 봉향하는 서원으로 17세기경 세워졌는데 대원군령으로 훼철 당하고 아쉽게도 현재에는 재사만이 남아 있을뿐이다. 정침 3칸, 사당3칸, 대문간 1칸의 목조기와집이며 담장은 돌담이다.
특히 이곳 승방재 앞에 2009년도에 조성된 700여평 승방묘원은 장수황씨의 종중 묘원으로 동내동 일대의 장수황씨의 선산이 택지지구 및 혁신도시지구에 편입됨에 따라 그곳에 있던 선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 종중 묘원으로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ㅇ 황경림(黃慶霖)의 자는 경서(景瑞), 호는 면와(窩와) 정승의 후(后)로 선조(宣祖) 임진왜란시에는 신해(申海)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의장(義將)이 되었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화산군(花山君),권응수(權應銖)등 제공(諸公)과 제휴하여 적을 격멸하였다. 후에 동내소(東內消) 승방곡(勝芳谷)에 은거하여 승방재(勝芳齋)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다.

 

ㅇ 대구시 동구 동내동은 1963년 개칭되었고 동내동은 법정동이고 행정동은 안심3.4동이다. 동쪽으로 경산시 하양읍과 닿아있고, 남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유적으로는 동호서당, 승방재, 영사재, 충효각 등이 전한다. 동호서당은 황경림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웠으며 정면4칸, 측면1칸으로 오른쪽에 대청마루 2칸이 있다. 승방재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이던 황경림을 기리기 위하여 17세기에 지은 재실이다. 정침 3칸, 사당3칸, 대문간 1칸의 목조기와집이며 담장은 돌담이다. 황경림은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을 지켜낸 뒤 승방곡에 은둔하였으며 순조때 동호사에 위패가 놓였다. 영사재는 승방재가 거의 폐가가 되자 1948년에 장수황씨 문중에서 지은 재실로 승방재의 현판과 면와실기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정면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건물 가운데에는 2칸의 대청마루가 있다. 충효각은 숙종때 배이인의 효심을 기려 세운 정려각이며 안에는 효행을 기록한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배이인은 순종때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지하철 안심역

 ▼ 안심역에서 대구방향 삼거리(송정삼거리)에서 오른쪽 반야월 구길(동부경찰서 방향)으로 접어든다. 

 ▼ 구길로 들어 20여키터 가다가 첫번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삼거리에 패밀리마트와 부림활어횟집이 있다.

 ▼ 삼거리에서 100여미터 들어가면 대구선 이전 부지가 나타난다. 이전부지의 우측은 현재 공원로가 조성되어 있고, 좌측은 현 조성중이다. 직진하여 도로를 따라간다.

 ▼ 대구선 이전부지 앞에서 100여미터 가면 좌측으로 안심교회가 보이고 안심교회 앞을 지나 굴다리 방향으로 간다.

 ▼ 안심교회 앞을 지나 100여미터 가서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아래를 지나고 ~

 ▼ 혁신도시 조성지로 접어든다. 혁신사업단 팻말이 붙어있고 아직 철거되지 않은 동내교회 일부가 다리 뒷쪽 왼쪽에 보인다. 

 ▼ 아직 완전히 철거되지 않은 폐가등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아직 주거하고 있는 집도 있다.

 

 ▼ 뒷쪽에 보이는 건물이 칠보사(조계종) 건물이다. 굴다리 밑을 통과하여 10여분 걸리지 않는다.

 ▼ 칠보사 정문

 ▼ 칠보사 경내

 ▼ 칠보사 정문 앞에서 동곡지(못)로 가는 길

칠보사 정문앞으로 난 길을 따르지 않고 칠보사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산기슭으로 올라붙기로 하였다.

 ▼ 칠보사 앞쪽에 자리한 주차장, 주차장에서 좌로 간다

 ▼ 조금 가면 사당이 한체 보인다.

 

 ▼ 사당을 지나 산쪽으로 진행하면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 발굴현장을 지나 희미한 길을 따라 100~200여미터 올라가면 이내 널찍한 등산로를 만난다.

 ▼ 꾸준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서 체육시설을 만나고 ~

 ▼ 벤취2개와 운동기구 3개를 갖춘 쉼터

 ▼ 체육시설 바로뒤 삼거리에서 왼쪽 오름길을 따라간다. 오른쪽은 우회길인듯 ~

 ▼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1. 직진은 초례봉, 오른쪽은 안심역, 지나온길은 나불지

 ▼ 이정표(↑초례봉2.0km, →안심역3.8km, ↓나불지 3.0km)

 ▼ 우측으로 꺾어서 안심역 방향으로 내려간다.

 ▼ 사진상으로는 느껴지지 않지만 꽤 급한 내리막길이다.

 ▼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2. 왼쪽은 승방재, 오른쪽은 안심역

 

 ▼ 이정표(←승방재 0.5km, →안심역 3.4km,↓초례봉 2.4km)

 ▼ 왼쪽으로 꺾어 승방재로 간다.

 ▼ 삼거리에서 오른쪽길로 간다.

 ▼ 승방묘원이 나타난다. 장수황씨의 종중묘원이다.

 ▼ 승방묘원 조성비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초례산 승방골의 기슭에 자리를 잡은 묘원이 있으니 이는 동내동에 세거지를 두었던 장수황씨 열성공파 면와공 종중의 묘원이다. 2,300제곱미터(700평)의 부지인 이곳에는 조선시대 황의 정승의 7세손이고 동내동(옛 안방곡)의 입향조(1598년)이신 면와공 황경림 의병장과 그 외아들 찰방 보현과 손자인 희룡, 우룡, 원룡의 다섯 선조를 묘원의 위쪽인 승방재 우측에 봉분을 하여 모셨다. 아래의 첫째줄은 종가의 묘역으로 1894년 고종때 성균진사에 등극하신 오당 황재찬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조의 묘를 평장으로 하였다. 그 외의 선조와 후손들도 화장한 유골을 평장함과 좌측에서 우측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대대로 함께 안장토록 하였다. 이는 합동위령제를 봉행함으로서 조상을 숭앙하고 전통적인 씨족의 보존유지와 목종화합을 위함이다. 이 묘원을 이곳에다 조성하게 됨은 본래의 선산이 동내동 마을의 서쪽에 위치하였으나 대구 동구 동내지역 택지개발과 대구혁신도시지구 지정으로 인하여 종중의 선산이 37,600제곱미터(11,370평)가 편입됨에 수많은 선조들의 묘소가 난관에 처하여서 이장할 곳을 물색한 곳이 심산유곡의 풍치를 지닌 승방곡이었다. 웅장한 팔공산의 맥을 이어 온 초례산의 기를 듬뿍 받은 이곳은 안온하고 아담한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쌓여 조상님들께서 평안하실 것으로 사료된다.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은 전형적인 좋은 혈처장이며 좌청룡과 우백호의 정이 있고, 맑고 고결한 기운의 호위속에 혈처는 보호를 받으니 그 응험이 대대손손 이어갈 길창지로써 문무는 물론 관직과 부귀가 지속적 이어질 것으로 사료되어 천제가 숨겨놓은 이 복된 명당자리를 얻게되어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 묘원이 이렇게까지 추진된 데이는 대종손 황문환씨와 대책위원

 ▼ 승방묘원 조성비
그리고 문유사들의 사명감과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고, 협조협력을 한 종인들의 덕분이다. 특히 계획에서 마감에 이르기 까지 긍지와 책임감을 갖고 혼신을 다해 노심초사한 경림공의 12세손 총무 황재항씨의 노고와 본 묘원조성에 관심과 뜻을 같이하여 거금을 들여 비석을 기증한 황우하 변호사의 공로는 이 묘원과 같이 후손만대에 빛날것이다. 앞으로 후손들은 망향의 심정으로 소홀함이 없이 이 묘원을 지성껏 보살필것으로 믿는다. 본 묘원의 승방재는 임란때 의병장 면와 경림공을 연차 봉향하는 서원으로써 1629년 3월 1일 향현 64세로 돌아가신 뒤에 처음에는 마을의 중심에다 동호사라는 명칭을 갖고 1639년에 세웠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곳 승방곡 깊숙이 이축함에 따라 승방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15년 중수된 역사적인 건물이다. 이 승방곡과 인연은 1561년 경산시 하양에서 태어나신 황경림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병하자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의병을 일으키고 31세의 나이로 의병대장이 되어 각 지역에서 출몰하는 왜적과 7년간을 결사분전하였다. 한번은 왕경림 장군이 초례산 꼭데기서 진을 치고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의병 100명을 이끌고 초례산 중턱에 진출한 수적으로 많은 왜군을 전술적으로 기습 공격하여 혼비백산대패시킨곳이 승방곡이였다. 이와 같이 면와공 종중의 상징이 될 동내승방묘원의 조성취지와 경위를, 승방재 및 승방곡의 역사적 내력을 후세대에 길이 남기고자 이에 온 종인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2009년 4월   일  면와공 종중 글     장수황씨 열성공파 면와공 종중 세움

 ▼ 승방재

좌측 건물이 서원(재사)건물이고, 우측은 관리인의 숙소였던것으로 보인다.

 

 

 ▼ 승방재 우측에 자리잡은 묘원

 

 

 

 ▼ 묘원 윗쪽에서 아랫쪽으로 바라본 모습

 ▼ 승방재의 윗쪽에서 골로 내려본 모습

 

 ▼ 승방재에서 약 9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다시 삼거리 방향으로 돌아온다.

 ▼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안심역 방향으로 내려간다.

 ▼ 자그만 다리를 건너고 ~

 ▼ 널찍한 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내려오면 삼거리에서 15분 정도 걸리면 못 앞에 이른다.

 ▼ 동곡지

 ▼ 동곡지 못둑을 따라 신서 혁신도시 굴다리 방향으로 간다.

 

 ▼ 혁신도시 조성지를 지나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여 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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