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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대구의 산/삼마산-거저산

대구 동구 삼마산, 거저산

by 영영(Young Young) 2009. 12. 12.

 

ㅇ 일 시 : '09. 12. 9(수) 흐리고 가랑비, 겨울날씨 답지 않게 포근

 

ㅇ 코 스 : 대구시 동구 미대동 미대마을 입구 - 성재서당 - 삼마산 - 산불감시초소 - 거저산 - 용수천(용수동, 미곡동) - 미대마을 입구(원점 회귀)

 

ㅇ 산에 갈려고 밖을 내다보니 곧 비가 쏟아질듯 날씨가 흐리다. 일기예보에도 오늘은 비가 온단다. 배낭을 챙겨서 밖에 나오니 가랑비 치고는 꽤 많은 빗줄기가 내린다. 갈까, 말까,,  아파트 마당에 서서 잠시 갈등을 한다. 오늘 코스가 길거나 험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비가 온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것 같지는 않아 일단 출발하기로 한다. 대구시 동구에 있는 "삼마산"과 "거저산"을 목표로 집에서 30여km 떨어진 대구시 동구 "미대마을"을 찾아간다. 오늘은 빗방울이 오락가락해서 카메라도 소니와 산요카메라 두개를 병행했고, 기록과 사진촬영도 다른때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이번 산행은 다른이에게 특별한 도움이 되지 못할것 같다. 다른날 보다 많이 아쉬운 하루였다.

 

  ▼ 영진 1/50000 지도상 오늘의 산행코스

 

 

 ▼ 팔공산 IC. 하루종일 흐리고 가랑비가 오락가락 한다.

 ▼ 오늘의 출발점인 미대마을 입구. 좌측에 고목수퍼가 있고 오른쪽에는 버섯 직판장이 있고, "미대마을" 표지석과 "성재서당" 표지판이 서있다. 고목수퍼 오른쪽 "미래1길"을 따라 들어가자 마자 삼거리에서 왼쪽길을 따라 마을을 지나고 임도길을 따라 약 20~25분(1.2Km)을 가면 "성재서당"을 만난다.

  ▼ 미대마을 입구

 

  ▼ 미대마을 입구에 서있는 마을 표지석

  ▼ 미대마을 입구에 서있는 성재서당 안내판

 ▼ 성재서당 입구

미대마을 입구에서 약 20~25분(1.2km)을 가면 성재서당이 있다.

 ▼ 성재서당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내용 ========================

성재서당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있는 조선시대 서당으로 1984년 7월 25일 대구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때의 선비 채명보(蔡明輔 : 1574∼1644)가 정자(亭子)를 짓고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뒤 후손들이 채명보의 높은 덕행(德行)을 널리 기리기 위해 새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성재서당으로 바꾸었다.
채명보는 채응린(蔡應麟)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는 선견(先見),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兩傳軒)이고 본관은 인천이다. 어려서부터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 1545~1609)과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구(鄭逑 : 1543~1620)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으며1617년(광해군9)에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1618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사건(西宮幽閉事件)이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상소(上疏)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향병(鄕兵)을 모집하고 군량미(軍糧米)를 수집하였다. 1626년에는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귀향하여 이곳에 성재정(盛才亭)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지냈다.

 

 ▼ 성재서당 입구 마당앞에서 보면 길이 왼쪽 오른쪽으로 두갈래 인데 오른쪽길을 따라 5분정도 올라가면 "인천채씨" 무덤이 보인다. 송담 채응린이 대구 검단동 배자못 부근 '배채'라는 곳에 살다가 임란 전 이 마을에 입향해 인천 채씨 세거지의 기틀을 닦았다고 한다.

 ▼ 인천채씨 무덤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길 흔적이 없는 능선에 합류하고 왼쪽으로 꺾어서 능선을 따라 오르막을 올라가면 뚜렷한 길이 드러난 342M 봉우리에 도착하고(채씨 무덤에서 약 10분),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가면 3분뒤에 삼마산에 이른다.

 ▼ 삼마산 정상에는 삼마산 표지판과 장판이 깔린 길쭉의자 한개가 있다. 전망은 별로다. 어떤분이 옛적에 삼밭이 많았다고 하여 삼마산이라고 하였다는데, 산이름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웹상에서 찾을수 없었다.

 ▼ 삼마산 정상 표지판 346m (김문암씨 작품)

 ▼ 오른쪽에 보이는것은 베개모양의 깔의자이다. 누가 조렇게 앙증맞게 만들어 놓았을까..

  ▼ 삼마산 정상의 길쭉의자. 가까이 사는 내동이나 미대동 마을주민의 손길일까.. 정겨운 느낌이 든다.

▼ 산행 시그널, 갑영이와 연인들, 근교산행에서 자주 접한다. 정말 대단하고 부러운 사람같다. 어떻게 저리 부지런할 수 있을까...

  ▼ 삼마산에서 거저산 가는 길(길주의)
삼마산 정상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직진하여 내려가지 말고 왼쪽으로 꺾어서 4~5미터 후 희미한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간다.

 ▼ 소나무에 걸린 시계뒷판에 이정표가 그려져 있다. 사진상에 보면 윗쪽(실제로는 오른쪽)이 거저산 방향, 사진상 왼쪽(실제로 직진)길은 옥정암(내동)방향이다.

 

 ▼ 삼마산에서 약 8분정도 내려오면 조그만 안부에 도착하는데 안부의 좌우는 골짜기이고 안부에서 직진하여 올라간다.

▼ 안부에서 곧바로 무명묘의 뒤를 지나고 ~  

 ▼ 삼마산에서 거저산으로 가는길은 대체로 잡목이 많지만 등로는 뚜렷하다. 무명묘를 지나 약 7분뒤 길 왼쪽으로 뾰족한 응봉이 얼굴을 내민다.

 ▼ 오름길 왼쪽으로 바위가 보이기 시작하고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바윗길이 잠시 있다.

  ▼ 삼마산을 출발하여 약 30분이면 초소봉(468.2m)에 도착한다.

 ▼ 초소의 뒷쪽에는 표식확인이 어려운 삼각점이 있고 ~

 

 ▼ 초소에서는 전망이 좋은데 오른쪽으로는 용수동 농가들이 내려보이고 그 뒤로 팔공산 능선과 비로봉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응봉, 응해산, 도덕산 등이 조망된다.

 

 ▼ 초소에는 갈림길인데 오른쪽길은 용수동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길은 거저산으로 가는길이다. 왼쪽길을 따라 5분정도 내려오면 크지 않은 바위 몇개를 만나고 ~

 ▼ 지나서 바위를 돌아보면 움집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 초소에서 거저산으로 가는 길은 이름만큼 거저 공짜로 가는 길처럼 편안히 간다. 거저산이 가까 와지면 약간의 오르막과 돌길을 만난다.

 ▼ 돌길을 만난뒤 5분뒤면 거저산 정상에 도착한다.(초소봉에서 약 22분 걸림).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거저산 정상에는 분명히 김문암님께서 제작한 정상 표지판이 있는것으로 알고 갔는데 정상 표지판이 없다. 한참을 찾았다. 혹시 이 봉우리가 아닌것일까 궁금해서 본인의 GPS고도를 확인한바 514m로 지형도(520.0m) 보다는 약 6m 정도의 오차가 있었다.


* 거저산의 명칭
종로도서관 홈페이지(http://jongnolib.koreanhistory.or.kr)에서 확인된 1918년에 제작된 지형도에 따르면 '거저산’의 경우, 한자로는 ‘擧底山’이라고 표기하고, 그 옆에 ‘ツルミッサン’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즉 이 산의 이름을 ‘밑(底)을 든다(擧)’는 의미로 ‘擧底山’이라고 표기한 것으로서, 원래 이름은 우리말로 '들미산’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집에 귀가하여 오늘 내가 찍은 위의 사진과 다른분이 이전에 찍은 아래 사진을 비교하여 보았다. 분명히 같은 산으로 거저산 정상이다. 어떤 연유로 정상 표지판이 사라진 것일까 무척 궁금해진다.

 ▼ 김문암님의 거저산 정상 표지판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웰빙산악회의 "여기는 거저산"이라는 리본이 달려있다.

 

 

 ▼ 혹시나 궁금해서 거저산에서 직진(오른쪽 방향)하여 파계봉 방향으로 진행하여 보았지만 100~200여 미터 후방에 억새가 무성한 좁은 공간에 산불감시탑과 초소가 있고 그 아래로는 수태골로 이어지는 순환도로가 보일뿐 인근에 또다른 봉우리는 보이지 않았다. 

 

 ▼ 다시 거저산 정상으로 돌아와 어디로 하산할까 잠시 망설였다. 올라온길로 곧바로 되돌아 갈까, 내동으로 갈까, 용수동으로 내려갈까?  잠시 망설인뒤에 용수동을 선택하여 초소봉 까지 되돌아간뒤 삼마산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산길을 따라가면 과수원쪽으로 내려오게된다.(거저산 정상에서 약 35분이 걸린다)

 ▼ 농가주택이 보이고 이곳이 대구시 동구 용수동 부남길 51번지다.

  ▼ 부남교를 건너기 직전에는 깨끗하고 깔끔한 느낌의 전원주택을 만난다.

 ▼ 부남교를 지나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가르뱅이2길" 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꺾어서 ~

 ▼ 용수천을 따라 내려간다. 상수원보호구역인 하천을 보호하기 위한 팬스가 설치되어 있고, 하천에는 간간이 물이 고여있고 억새등이 무성하다.

▼ 용수천을 따라 마을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용수동 당산을 만난다.

 용수동 당산 [龍水洞堂山]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마을에 있는 당산은 1995년 5월 12일, 대구민속자료 제4호 지정되었다. 용수마을은 달성군 공산면 용수동이었으나, 1981년 대구광역시 동구에 편입된 지역으로,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로 가는 왼쪽 골짜기에 자리잡은 곳이다. 이 마을은 배씨와 구씨가 들어와서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80여 호의 각성(各姓)촌락을 이루고 있다. 용수동이라는 이름은 마을 입구 당나무 옆 개울에 용연못이 있어 그곳에 용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수동 당산의 유래는 이 마을을 개척한 배씨와 구씨가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고 돌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생겼다고 전해진다. 제사는 마을의 평안과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1명의 제관을 뽑아 정월 보름날 새벽에 지낸다.

제관을 뽑는 방법은 섣달 그믐날 당에서 당굿을 쳐서 당신의 대내림을 받아 신대가 가는대로 따라가서 멈추는 집이 제관이 되었다. 만약 제관의 의무를 거부하면 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과거 신대가 멈춘 집에서 제관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대가 쓰러지면서 소의 등을 쳐서 죽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제관이 제수(祭需)까지 모두 준비하는데 비용은 마을에서 거두어 공동부담으로 하며, 제관은 제사 지내는 날 새벽 마을 앞의 개울에서 목욕재계 후 제사를 올렸다.

당굿은 30여 년 전까지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에 하였으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없어지고, 당나무와 돌로 쌓은 당(堂)만 남아 있다. 제의에 관한 내용과 절차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용수동의 당나무와 당은 마을의 개척 시기와 비슷한 300여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듯하다.

 

 

 

 

 

 ▼ 용수천에는 억새가 무성하다.

   

 ▼ 용수천 도로변에 있는 전원주택. 석축위의 꽃이 너무 이뿌다.

  ▼ 마을안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어릴적 고향동네의 추억을 되살린다.

 

 ▼ 용수천을 따라 용수동 마을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서 미대동 마을로 향하는 길에는 대단위 화훼단지가 있다.

 

 

 

 ▼ 미대동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

 ▼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미대마을 입구에 도착. 주차해 놓은 달구지를 타고 집으로 ~~

 ▼ 하양 창신무학 아파트

 

 ▼ 삼보 CP-100 산행궤적(네이버 지도)

 ▼ 삼보 CP-100 산행궤적(네이버 지도)

 ▼ 삼보 CP-100 산행궤적(네이버 지도)

 ▼ 삼보 CP-100 산행궤적(다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