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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영의 보금자리
▣ 대구의 산/왕산,응해산,응봉

신숭겸장군유적지-왕산-응해산-응봉-신숭겸장군유적지

by 영영(Young Young) 2009. 11. 20.

ㅇ 일    시 : 2009. 11. 17(화) 맑음. 쌀쌀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약 23km 떨어진 대구시 동구 지묘동 신숭겸장군유적지 앞 도로변에 주차후 산행시작


ㅇ 코      스 : 신숭겸장군유적지-왕산-응해산-응봉-신숭겸장군유적지
ㅇ 거      리 : 약 7~8km
ㅇ 소요시간 : 약 4시간 정도

 

▼ 영진 1/50000 지도로 본 오늘의 산행코스

 ▼ 다음 지도상 오늘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

 ▼ 네이버 지도상 오늘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

 ▼ 신숭겸장군 유적지 앞에 위치한 다리가 지묘2교이다. 지묘2교뒤로 유적지와 왕산이 보인다.

 ▼ 지묘2교 다리를 건너면 다리뒤로 신숭겸장군유적지가 위치하고 다리 끝 오른쪽에 에어청소기가 있고, 왼쪽에는 공산2동 자율방범대 녹색 콘테이너 박스가 있음.

 ▼ 다리를 건너 전신주에 표지된 "왕산길"방향(대곡지로 가는 길)인 오른쪽으로 꺾어 왼쪽 담장을 끼고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간다.

 ▼ 오른쪽으로 꺾으면 곧바로 우리의한실(대곡골)을 아름답게라는 공산중학교의 입간판이 서있다.

 ▼ 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성타운 아파트가 서있다.

 ▼ 지묘2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약 100m정도 가면 왼쪽으로 나무 팻말(소나무재선충병...)이 있음,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됨,

 

 ▼ 팻말에서 약 10m 정도 오르면 통정대부공조참의 경주최공 무덤군이 있고 무덤뒤로 올라가는 길이 하얗게 드러나 보임.

 ▼ 등로 왼쪽에 나즈막한 돌무지앞에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 보면 왼쪽으로 공산댐이 보이고 댐의 오른쪽으로 보성아파트 단지와 지묘동 아파트 단지가 훤하게 내려 보인다.

 

 

 ▼ 산 아래서 조금 급경사길을 약 20여분 올라가면 삼각점이 있는 왕산(王山)(GPS 244m)에 도착

 ▼ 삼각점 (대구 805, 1982재설)

 ▼ 왕산(王山) : 지묘동 뒷산에서 신숭겸이 견훤에게 참수당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한동안 울었다고 한 왕산은 산불로 인해 큰 나무가 없고 잡목만이 무성한데 그나마 토양이 척박하여 새로 식수한 나무도 잘 살아남지 못하는것 같았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는 대구 무태의 서원연경 마을 뒷산을 '왕산'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같은 기관의 1/25000 지도와 '신산경표'라는 책에서는 이곳 지묘동 뒤 246m산(현재 오른 산)을 왕산이라 했다.

왕산은 작은 암반(돌)이 몇개 있는 봉우리로 잡목으로 인해 조망은 좋지않고 봉우리 왼쪽에서 올라오는 길 하나가 보이고, 정면에 보이는 철탑방향으로 능선전망이 트인다.

 

왕산의 이름처럼 대구에는 대구에는 왕건이 후백제 견훤에게 패퇴 하면서 생긴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1.왕굴(王窟) : 팔공산 파계재 전투에서 패하여 앞산 은적사 부근 동굴에서 피신 한 곳.
   2.살내(箭灘) :금호강과 서변천이 합류하는 지점 부근에서 양측이 서로 쏜 화살이 강바닥에 가득하다는 의미의 살내.
   3.파군재(破軍峙) : 동화사와 파계사 가는길의 갈림길목. 왕건이 이곳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
   4.지묘동(智妙洞) :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갈아입고 후백제군과 맞서 싸우는 동안 왕건을 피신시킴.
   5.독좌암(獨座巖) : 도주중 혼자서 쉬었다는 바위.
   6.해안동(解顔洞) : 들판을 빠져 나가면서 적을 따돌리자 비로소 얼굴색이 돌아옴.
   7.불로동(不老洞) : 어른은 피신가고 아이들만 있었던 곳.
   8.실왕리(失王里) : 평광동 부근에서 나무꾼한테 주먹밥을 얻어먹고 매여동 쪽으로 도망갔는데 나중에 나무꾼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 안전하게 숨겨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함을 탄식한곳. 실왕리, 시량미, 시랑리, 평강동앞 하천을 시량천.
   9.안심동(安心洞) : 매여동 일대를 안심(安心)이라 하는데 이곳에 와서 비로소 안심하게 되었다는 곳.
   10.반야월(半夜月) :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의 도주로를 비춰졌기 때문에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는 곳.
   11.은적사(隱跡寺) : 도주중 이곳에서 몸을 숨겼다 하여 은적사.
   12.안일사(安逸寺) : 약간 편하게 쉬었던 곳.
   13.임휴사(臨休寺) : 마음놓고 편히 쉬었던 곳.
   14.무태동(無怠洞) :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일부만 살아서 도망가는 중이라도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왕건의 명령이 하달된 곳  
   15.왕산(王山) : 지묘동 뒷산에서 신숭겸이 견훤에게 참수당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한동안 울었던 산
   16.나팔고개 : 적은 군사지만 사기를 높이려고 앞뒤좌우에서 나팔을 불게 했다는 나팔고개.

 

▼ 왕산에서 철탑방향으로 직진하여 내려간다.

 

 ▼ 왕산에서 내려오면 남바없는 철탑을 만나고 철탑 10여미터 후방에 안부가 있고, 안부에서 직진하여 올라간다.

 ▼ 철탑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공산터널이 얼굴을 내민다.

 

 ▼ 철탑에서 3~4분후에 두번째 철탑인 23번 철탑을 만나고 ~

 

 

 ▼ GPS 285m봉, 봉우리의 오른쪽에 전망바위가 있고, 바위쪽으로 공산터널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파군재에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내려보인다.

 

 

 

 ▼ 285봉에서 잠시 가파르게 내려간뒤 평탄한 능선길이 이어지고 ~ 평탄한길로 가는중에 정면에 응해산 정상의 산불무인감시카메라탑이 보인다.

 

 ▼ 민밋한 봉우리를 지나 내리막길로 가다가 안부에 도착하고 안부에서 직진하여 완만히 오름길에 소나무 아래 등로 오른쪽으로 잡초가 무성한 무덤1기가 있는데 비문을 알수없는 비석이 있다.

 ▼ 묘를 지나면서 약 1~2분간 급한 오르막이 시작되고, 완만한 오르막과 평탄한 길을 번갈아 가면 작은바위 2개가 있는 밋밋한 GPS 275m 봉우리의 오른쪽을 지난다.

 ▼ 275봉의 오른쪽으로 완만한 내리막길을 30초 정도 내려갔다가 다시 오름길이 이어지고 ~ 응해산을 오르는 길에 바위지대를 만난다.

 ▼ 산불흔적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 조금 경사진 오르막길을 한참동안 올라가면 동응해산 정상에 도착한다. 동응해산 정상(GPS 502m)

 ▼ 정상 입구에는 무인산불감시카메라탑이 있고 ~

 ▼ 깔판 2개와 나즈막한 돌탑이 있다.

 ▼ 왼쪽 아래로는 편도1차선의 아스팔트 도로 2개가 지나가고 ~

 ▼ 뾰족한 도덕산이 보인다.

 ▼ 오른쪽으로는 지묘동이 보이고, 정면의 좌측으로는 팔공산 능선이 수목사이로 가깝게 보인다.

 

 

 

 ▼ 팔공산 능선

 ▼ 팔공산 비로봉의 모습(40배줌)

 

 

 

 

 

 

 

 

 ▼ 응해산 정상에서 직진하여 완만히 내려가다가 작은 바위군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

 ▼ 등로 오른쪽에 특이한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가파른 내리막길은 이어진다. 뒤로 보이는 뾰족한 봉이 올라가야할 응봉이다.

 ▼ 인천 모씨 묘를 지나고 ~ 잇달아 3기의 묘를 지나면 ~

▼ 지묘동과 내동을 연결하는 임도를 만나는데 ~

 

 ▼ 지묘동과 내동을 표시한 표지판

 

 ▼ 내리 방향에 서있는 임도 안내문

 

▼ 임도변에 체육시설이 있고 마침 동네주민이 열씸히 운동중이었다.

 ▼ 임도에 내려서면 왼쪽으로 팔공산 능선이 가깝게 다가온다.

 

 ▼ 응봉을 가기 위해서는 임도를 횡단하여 맞은편 산으로 접어든다.

 

 ▼ 완만한 오르막을 따르면 영천이씨 묘1기를 만나고 ~ 

 ▼ 영천이씨의 묘뒤로 이어지는 아주 가파른 길을 따라 응봉을 향해 올라간다. 낙엽에 덮혀서 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길은 미끄럽다.

 ▼ 임도에서 약 30여분만에 도착한 응봉 정상은 바위 봉우리로 김문암씨가 제작한 응봉 표지판이 달려있고 ~

 

 

 

 

 

 

 ▼ 표지판에서 왼쪽으로 20여미터 가면 삼각점이 보인다.

 ▼ 삼각점(대구421/1982재설)

 ▼ 삼각점에서 20~30여미터 못가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왼쪽길은 공산터널 방향이다.

 ▼ 응봉 정상에서 조금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르다가 바위군을 만나고 ~

 

 ▼ 잠시 평탄한 길을 지나 왼쪽에 "통정대부행보주목사명곡최공지묘"를 만난다.

 ▼ 가파른 내리막길을 계속 따르면 오른쪽에 "처사경주최공한대교 묘"가 있고, 20여미터 후방에 그물망을 쳐놓은 텃밭과 뒷쪽 나즈막한 봉우리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 텃밭 앞에도 묘가 자리하고 있다.

 ▼ 체육시설이 위치한 봉우리를 오르기 직전에 뒤돌아보면 지나온 응해산과 응봉이 보인다.

 ▼ 나즈막한 봉우리에는 벤취3개와 두어개의 운동시설이 있다.

 ▼ 봉우리의 왼쪽으로 공산터널이, 오른쪽으로 지나온 서응해선 능선이 보인다.(서응해산 사진은 찍지않음)

 

 ▼ 봉우리를 지나 평탄한 길을 따르다가 뒤를 돌아보면 좌측에 응해산, 오른쪽으로 응봉이 보인다.

 

 ▼ 체육시설을 지나 약 2분 정도 평탄한 길을 가다가 철탑을 만나고 ~

 ▼ 철탑뒤로 묘1기와 좌측 공산댐, 우측 보성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 24번 철탑 아래를 지나면 "달성서씨한양태"묘가 있고 ~

 ▼ 한씨 묘를 지나서 내려오면 잘 단장해 놓은 묘 1기가 있고 묘 뒤로 철탑(No59)이 서있다.

 

 

 ▼ 철탑을 지나서는 마을이 내려보이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간다.

 

 ▼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내려가면 삼거리 임도가 보인다.

 ▼ 임도 삼거리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왼쪽으로 꺾어서 임도를 따라간다.

 

 

 

 

 ▼ 임도를 따라 약 300여 미터 진행하면 오늘의 들머리가 나타나고 ~

 ▼ 팻말 왼쪽으로 오름길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

 ▼ 들머리에서 약 100여미터 가면 지묘2교 및 신숭겸장군 유적지 앞에 도착한다.

 

우리집 시조인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잠시 돌아보았다.

 

□ 신숭겸 장군 유적
  ㅇ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고려 초기 무신 신숭겸의 유적(고려시대)
  ㅇ 대구기념물 제1호(1981년 7월 1일) 대구 동구 지묘동 526 면적 : 7, 804㎡, 평산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ㅇ 신숭겸은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함께 궁예를 내몰았다. 동시에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ㅇ 927년(태조 10)에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려고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상대로 대구 공산(公山)에서 싸웠으나 크게 졌다. 이 싸움에서 왕건의 목숨이 위기에 처하자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과 같이 싸우다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하였다. 이를 틈타 왕건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탈출하였다. 왕건은 신숭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에 예를 갖추어 묻어주었다. 전사한 자리인 이 곳에는 지묘사(智妙寺),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뒤 지묘사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함께 폐사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뒤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에 이 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진 뒤부터는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새로 지어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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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 신숭겸(申崇謙)
 - 한   고려 초의 무신.
 - 본관 : 평산(平山)
 - 별칭 :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 출생 : 광해주(光海州: 春川)
 - 신숭겸(申崇謙)은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왕으로 변장한체 태조를 숨기고 대신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한참뒤에 머리없는 그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고 없어진 머리를 만들어 태조가 직접제례를 행하고 광해주 비방동(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한 후 전사한 그 자리에 단(순절단 殉節壇)을 모으고 절(智妙寺)를 지어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묘소에는 그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제향은 중앙의 봉분앞에서 행하고 있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 일화 : 신숭겸이 태조를 따라서 사냥갔다가 삼탄(三灘)에 이르렀는데 마침 기러기 세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 누가 이를 쏘겠는가 >하니 숭겸이 말하기를 < 臣이 쏘아 보리다 >하였다. 태조가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자 숭겸이 말하기를 < 몇 째 기러기를 맞히리까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하였다.   숭겸이 명에 응하여 과연 시키는 대로 맞히는지라 태조가 탄복하고 곧 명하여 平州(平山의 古號)를 賜하여 貫鄕을 삼게 하고 아울러 기러기를 쏘던 근방의 땅 三百結을 하사하여 子孫 代代로 그 租를 거두게 하고 因하여 그 곳을 弓位라 이름하였다

 

□ 평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박(朴), 소(邵), 신(申), 유(庾), 윤(尹), 이(李), 조(趙), 차(車), 한(韓)

 

□  신숭겸 묘역은 어디에 ?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고려시대. 강원기념물 제21호. 장절공 신숭겸의 묘.

 

□ 평산시씨 인물

 [신흠]
  ㅇ 1566∼1628(명종 21∼인조 6) ]
  ㅇ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 시호는 문정(文貞), 도사 신승서의 아들.
  ㅇ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 감찰, 병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ㅇ 1592년 임진왜란 때 양재도 찰방을 거쳐 그 후 지평, 사성, 대사간, 부제학, 도승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으로 세자책봉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ㅇ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의 한 사람이므로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ㅇ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겸했으며, 노서의 중진으로 우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 5) 좌의정이 되었고, 이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하다가 돌아와서 영의정에 올랐다.
  ㅇ 정주학자로 문명이 높았고,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조선 중기 태두로 일컬어진다.
  ㅇ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신립(申砬)]
  ㅇ 조선 도제찰사. 신화국의 아들. 1567년(선조 즉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 도사?경력을 지내고 진 주판관이 되었다.
  ㅇ 1583년 온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한 나탕개를 격퇴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ㅇ 1587년 홍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으나 이미 왜구들이 철수했으므로 돌아왔다.
  ㅇ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다음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하여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싸웠으나 참패하여 부장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익희(申翼熙)]
  ㅇ 대한민국 국회의장.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海公). 장례원경 신단의 아들.
  ㅇ 1910년 한성외국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에 가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ㅇ재학중 학우회를 조직, 총무, 평의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다.
  ㅇ 1917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지도했다.
  ㅇ 해방후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이 되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ㅇ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총장을 역임했고, 1946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당선, 이듬해 입법의원의장이 되었다.
  ㅇ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부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 8월 의장이 되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의장이 되고, 이어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ㅇ 그 동안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맡아 야당을 영도했으며, 1956년 민주당 후보로 제3대통령에 출마하여 한강 유세를 마치고 호남지방 유세차 가돈 도중 열차 안에서 급사하여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ㅇ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 평산신씨외의 또다른 신씨는?

 ㅇ 고령신씨 시조 : 신성용(申成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 군기감을 역임했다.
  신성용의 선조는 신라의 선비로 대대로 고령에 살면서 호장을 지내왔으므로 후손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8세손 신숙주가 익재좌리공신으로 고령 부원군에 봉해졌다.
 ㅇ 또 다른 신씨에는 삼갈신(愼)씨(거창신씨)도 있고, 매울신(辛)씨(영산신씨=영월신시)씨도 있다.

 

□ 가구 및 세대수는 ?
2000년 조사 때 154,612가구 496,874명. 1985년에는 460,238명

 

□ 본관지 평산은 어디인가 ?
고대 : 고구려 때 다지홀로 불리다가 뒤에 대곡군으로 개칭./ 747년(신라 경덕왕 6), 대곡성을 설치. / 757년(신라 경덕왕 16), 영풍군으로 바꿈./ 904년, 궁예 점령한 후 평주로 잠시 불림.
고려 : 940년(태조 23), 평주로 바꿈. 1272년(원조 13), 복흥군 즉 배천에 잠시 예속됨.
조선 : 1413년(태종 13), 평산도호부로 승격.
근대 : 1895년(고종 32), 평산군으로 개편.
현재 : 황해도 평산군 지역. 해방 전의 평산군은 14개 면과 161개 리로 구성됐다. 1952년 12월에 당시 평산군 안성면, 남천면, 금암면, 서봉면과 평산면의 5개 리, 문무면의 3개 리, 금천군 동화면의 5개 리를 합병해 평산군(평산읍, 22개 리)을 구성했다. (글. 배우리)

 

 ▼ 신숭겸장군 유적지 입구

 

 

 

 

 

 

 

 

 

 

 

 

 

 

 ▼ 장군유적지를 한바꾸 돌고난뒤 앞에 보이는 칼국수집을 찾아 뜨끈한 칼국수 한그릇, 쌀쌀한 날씨에 속이 후련한것 같았다.